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혁련발발 (문단 편집) === 북하 건국 === 407년, 북위의 [[도무제]] 탁발규와 후진의 문환제 [[요흥]]이 서로 포로를 교환했다. 북위에선 일전에 전투에서 사로잡은 후진의 월기교위 당소방(唐小方)을 보내왔고, 후진은 억류했던 북위의 사자 북부대인 하적간(賀狄干)을 말 1,000여 필과 함께 돌려보냈다. 유발발은 이 소식을 듣고 요흥이 원수인 북위와 화친한다고 오해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유연(민족)|유연족]]이 북위에 바치려던 말 8,000필을 중간에서 탈취하고, 자신의 무리 30,000명으로 고평을 습격해 장인인 몰혁간을 살해했다. 유발발이 몰혁간의 무리까지 흡수해버리니, 그가 이끄는 인마는 수만에 이르렀다. 유발발은 스스로 [[하나라]] 사성 [[계왕(하나라)|하후씨]]의 후손임을 칭하면서 [[북하]]를 건국해, 대하천왕, 대선우(天王, 大單于)를 자칭하고, [[연호]]를 [[용승]](龍昇)이라고 했다. 큰형 유우지대(劉右地代)를 승상, 대공(代公)으로 삼고, 둘째형 유역사제(劉力俟提)를 대장군, 위공(魏公)으로 삼았다. 또, 질간아리는 어사대부, 양공(梁公), 동생 유아리라인(劉阿利羅引)은 정남장군, 사예교위, 유약문(劉若門)은 상서령, 유질이달(劉叱以韃)은 정서장군, 상서좌복야, 유을두(劉乙斗)는 정북장군, 상서우복야에 각각 임명했다. 이렇게 하왕에 오른 유발발은 총명했으나 성정이 잔학하여 북하의 백성들은 학정(虐政)에 시달렸다. 407년 10월, 북하를 건국한 유발발은 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선비족 설간부(薛干部) 등 3부를 격파해 그 무리 10,000여 명을 항복시켰다. 그리고는 삼성(三城)[* 현재의 중국 [[옌안시]].] 이북에 후진이 세워둔 여러 주둔지를 토벌하여 후진의 장수 양비(楊丕)와 요석생(姚石生) 등을 죽였다. 유발발 휘하의 장수들이 고평을 도읍으로 삼은 후 지켜야한다고 간언했으나 유발발이 거절하며 말했다. >"너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구나. 나는 대업을 이루었으나 군대가 많지 않고, 요흥도 당대의 영웅이라 아직 관중을 도모할 수는 없다. 게다가 후진의 각 진영들은 명령을 잘 받들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데, 만약 우리가 고평성 하나만 지킬 때, 후진군이 힘을 합쳐 고평을 공격해오면, 성은 반드시 함락되어 우리는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신속하게 움직여서 후진군이 전방을 구원하러 가면 후방을 치고, 후방을 구원하러 가면 전방을 치는 방식으로 그들을 바쁘게 한다면''', 10년도 안되어 우리는 영북(嶺北)과 하동(河東) 지역을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힘을 기르다가 요흥이 죽게되면 그때 장안을 공략해 나약한 그의 아들 [[요홍]](姚泓)을 사로잡으면 된다. 과거 [[황제(중국 신화)|헌원씨]]도 사람들을 이끌고 2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왔다갔다 했는데, 하물며 나라고 못할 쏘냐!" 그리하여 북하군은 유발발의 지휘 아래 한동안 전통적인 [[유목민족]]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일부러 도읍을 정하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독특한 전략을 채택하는 등 [[유격전]]을 벌이며 후진을 압박했다. 특히 영북군과 하동군을 자주 침략해오니, 각 성문은 낮에도 감히 문을 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발발의 계책으로 국경이 혼란스러워지자, 문환제 요흥은 >"내가 요옹의 말에 따르지 않아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라며 탄식했다. 407년 11월, 유발발이 [[남량]]의 군주 [[독발녹단]]에게 혼약을 청했지만, 독발녹단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유발발은 이 일을 빌미로 2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양비(楊非)에서 지양(支陽)까지 총 300여 리를 진격해 10,000여 명을 살해하고, 백성 27,000여 명과 소, 말, 양 등 가축 수십만 구를 노획한 뒤 돌아갔다. 독발녹단이 북하군을 추격하려고 하자 초랑(焦朗)이 말렸다. 독발녹단은 분노하여 >"내게 계책이 있으니 추격하지 말라고 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 라며 엄포를 놓고 출진했다. 유발발은 독발녹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양무(陽武) 아래의 골짜기에 얼음을 뚫고 수레를 묻어 길을 막고는 진격해오는 남량군을 맞았다. 드디어 북하군을 만난 독발녹단은 먼저 활을 잘쏘는 병사들을 앞으로 보내 활을 쏘게 했는데, 유발발의 왼쪽 팔뚝에 화살이 꼳혔다. 하지만 유발발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화살을 뽑은 뒤, 날랜 기병들을 몰아 매섭게 진격하니, 예상외의 기동력과 용맹함에 놀란 남량군은 황급히 맞서싸우다가 결국 대패했다. 독발녹단은 겨우 도망쳤지만 북하군에게 80여리를 추격당했고, 전사한 남량군이 10,000명, 전사한 용장은 10여 명이었다. 유발발은 남량군의 시체를 쌓아 [[경관]]을 만들고 '촉루대'(髑髏臺)라는 이름을 붙이며 조롱했다. 이후 노획한 물자들을 가지고 다시 북하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