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혁련발발 (문단 편집) === 관중 공략 === 416년 6월, 혁련발발이 4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20일 만에 상규를 점령해, 후진의 진주자사 요평도(姚平都)와 후진군 5,000여 명을 죽이고 그 성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안정군의 음밀(陰密)을 쳐 그곳을 지키던 요랑자(姚良子)와 후진군 10,000여 명을 사살했다. 혁련발발은 태원공 혁련창을 전장군, 옹주자사로 삼아 음밀을 진수하도록 했다. 음밀을 빼앗겼단 소식을 들은 정북장군 요회(姚恢)는 안정군을 버린 채 수도 장안으로 도망쳤고, 안정군 사람 호엄(胡儼)과 화도(華韜)가 5,000여 호를 이끌고 혁련발발에게 투항했다. 혁련발발은 호엄을 시중, 화도를 상서로 임명해 안정군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옹성(雍城)을 쳤는데, 옹성을 수비하던 요심(姚諶)은 장안으로 도망쳤다. 혁련발발이 계속 진격하여 미성(郿城)에 주둔했다. 문환제 요흥이 붕어하고 그 자리를 계승한 [[요홍]]이 동평공 요소(姚紹)와 정로장군 윤소(尹昭)에게 보•기 50,000명을 주어 미성에 주둔한 북하군을 치니, 혁련발발이 패배해 다시 안정으로 퇴각했다. 이때 북하에 항복했던 호엄 등은 혁련발발이 감시 목적으로 남겨둔 양구아(羊苟兒) 등을 습격해 살해하고는 다시 요홍에게 안정군을 들어 항복했다. 혁련발발은 하는 수 없이 행성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추격해오던 요소와 안정군 남쪽에 위치한 마안판(馬鞍阪)에서 만나 대패하고 말았다. 행성으로 무사히 도망쳐온 혁련발발은 다시 혁련나제를 보내 부풍군의 지양(池陽)을 공격하고 후진의 거기장군 요유(姚裕) 등을 물리쳤다. 416년 8월,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무제(유송)|유유]]가 후진을 정벌한다는 소식에 혁련발발이 웃으며 말했다. >"[[송무제|유유]]가 수륙 양면으로 후진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데, 유유는 세상 사람보다 뛰어난 지략을 지니고 있으니 요홍이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 내 예상컨대 유유는 반드시 요홍을 물리칠 것이다. 게다가 요씨 형제들은 내부에서 서로 불화하고 있으니, 어찌 외부의 침략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유유가 장안을 함락한 후, 자제들과 각 장수들을 관중에 남겨두고 속히 돌아가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구나. 유유 등이 출발하면 나는 땅을 줍는 것처럼 쳐들어가 쉽게 관중을 얻을 수 있어, 더이상 우리 병마를 고생시킬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혁련발발은 이후 즉시 병기와 군마를 정비하고, 나아가 안정군을 다시 점령하자, 영북군의 모든 군현이 북하에 항복했다.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가, 혁련발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형제를 약조하자고 했다. 이에 혁련발발은 암암리에 중서시랑 황보휘(皇甫徽)에게 회신을 대신 쓰라 명령했고, 황보휘가 회신을 써오자 몰래 받아 그걸 사신에게 건네주었다. [*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서 대필을 명령한 건 아니고, 당시 한족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쓰던 격식있는 문체에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혁련발발의 회신을 읽은 유유는 그의 박식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혁련발발을 직접 만나고 온 사신 또한 그의 기이하고 잘생긴 용모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유유는 >"내가 그보다 못하구나!" 라며 탄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는 고작 12살인 아들 [[유의진]]을 장안 수비의 총책임자 직책에 앉히고, 동진으로 돌아갔다. 혁련발발이 크게 기뻐하며 왕매덕을 불러 관중을 공략할 방법을 물었다. 왕매덕이 답했다. >"관중의 지세가 비록 유리하나,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에게 이를 지키게 한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유가 이런 결정을 하고 황급히 돌아간 이유는 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제위 찬탈을 하고자 하여, 중원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장강 이남과 관중을 잇는 요충지인 청니(青泥)와 상낙(上洛)에 유격대를 배치하시어 동진과의 왕래를 차단하고, 동관(潼關)과 효섬(崤陝)에 군대를 주둔시켜 수륙 양로를 점거하십시오. 그런 다음 폐하께서 관중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은덕을 널리 알린다면, 관중의 백성들은 모두 술과 음식을 들고 폐하의 군대를 환영할 것입니다. 유의진 혼자 빈 성에 앉아 도망갈 곳이 없을 터이니, 반드시 10일 안에 폐하 앞에 와서 투항할 것이고, 이리하면 병사들의 칼에 피를 묻힐 필요없이 바로 관중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혁련발발은 이를 매우 옳다고 여겨, 태자 혁련괴를 도독선봉제군사 겸 무군대장군으로 삼아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또한 전장군 혁련창에게도 군사를 주어 동관을 치게 하고, 왕매덕을 무군우장사로 임명해 청니의 길을 끊게 했다. 418년 정월, 혁련괴가 위양(渭陽)에 이르자, 관중의 백성들이 줄을 지어 항복해왔다. 동진의 유의진은 용양장군 [[심전자]]를 보내 북하군을 막았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유회보(劉回堡)로 퇴각했다. 유회보에서 한숨 돌리던 심전자는 평소 자신이 싫어하던 사마 [[왕진악]]을 살해했고, 심전자는 왕수(王修)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이에 유의진은 다시 [[부홍지]](傅弘之)를 보내 지양(池陽)에서 혁련괴를 격파하고, 과부도(寡婦渡)에서 한번 더 격파시키니, 혁련괴는 잠시 물러났다. 그럼에도 유의진은 북하가 두려워 밖에 있었던 군사를 모두 장안성 안으로 소환하고는 성문을 걸어 잠그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의지할 데가 없어진 관중의 군현들은 모두 북하에 투항했다. 패잔병 수습을 마친 혁련괴가 군사를 몰아 장안성을 야습했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418년 11월, 혁련발발이 친히 군사를 일으켜 함양(咸陽)을 차지하고 보급로를 끊었다. 동진에선 옹주자사 [[주령석]]을 보내 유의진을 돕게 했지만, 유의진과 그의 장수들은 더이상 성을 지켜낼 수 없음을 알고 방종하여 장안성을 크게 약탈했다. 약탈을 마친 유의진은 수많은 보물 및 여자와 아이 등을 수레에 싣고 성에서 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이런 막장을 지켜보다 못한 옹주별가 위화(韋華)는 몰래 행렬에서 빠져나와 북하에 투항하고 혁련발발에게 현 상황을 고했다. 혁련발발이 즉시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유의진을 추격하니, 건위장군 부홍지가 유의진에게 약탈품들을 모두 버리자고 권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유의진은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약탈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북하의 군대가 유의진의 무리를 따라잡자, 부홍지와 보국장군 [[괴은]]이 나서서 사력을 다해 막으며 이동을 계속했지만, 결국 청니에 이르렀을 때 혁련발발과 왕매덕에게 양면으로 협공을 당하면서 유의진의 동진군은 전멸했다. 북하군은 [[부홍지]], 괴은, 사마 [[모수지]] 등 동진군의 여러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다만, 총대장인 유의진은 부하 장수들의 희생으로 겨우 인근 수풀 속에 숨어있다가 중병참군 단굉(段宏)에게 구조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혁련발발은 부홍지를 회유하려고 했으나, 부홍지가 욕하며 저항하니 사로잡은 동진군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죽여버렸다. 혁련발발은 지난 양무 전투때와 마찬가지로 동진군의 머리로 [[경관]]을 쌓아 '촉루대'를 지었다. 한편, 홀로 남아 장안을 지키던 주령석은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장안에서 쫓겨나 동관으로 도주했다. 혁련발발은 장안으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왕매덕을 도관상서, 관군장군, 양무후로 삼았다. 동관으로 도망치던 주령석은 조공루(曹公壘)에 이르러 용양장군 왕경선(王敬先)과 합류했는데, 마침 주령석의 동생인 중서시랑 [[주초석]]도 형을 돕기 위해 조공루에 미리 와있었다. 그러나 혁련창이 조공루를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주령석, 주초석 형제와 왕경선, 우군장군 유흠지(劉欽之) 등을 모조리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했다. 혁련발발은 장안에 도착한 포로들을 모두 죽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