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대미술 (문단 편집) === 사회 환경의 변화: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형식의 요구 === 기술 변화 외에도 사회 변화 면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에 입각한 공화국이 시작된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미술은 이런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예술이 여전히 과거 왕정시대의 형식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예술은 1) 신이나 천사나 영웅같이 현실과 동떨어진 대상들을 미화했고 2) 그리스 로마같이 먼 과거의 것들을 미화했으며 3) 종교나 권력자 같은 특정 대상을 이상적인 것으로 미화해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는 혁명 이후의 현실에 걸맞지 않았다. 이 새로운 시대는 이성과 합리의 시대여야 했고, 서열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여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특정 대상을 미화하는 표현은 등장해선 안됐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절대신인 마냥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상당수 예술가들이 이런 꼴을 못마땅해 했다. 때문에 이를 거부하려 시도했는데, 문제는 그러려면 사실적인 그림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실주의|사실주의자]]인 [[쿠르베]]는 1을 거부했다. 쿠르베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허깨비는 안그리겠다고 했다. [[에두아르 마네]] 같은 [[인상주의|인상주의자]]들은 나아가 2를 거부했다. 그들은 신화나 이국적인 것을 그리지 않고 자기 주변에서 놀고 먹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3을 위해 이후의 예술가들은 'XX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기존의 색채를 벗어나거나([[마티스]]), 기존의 형태를 벗어나([[피카소]]), 아예 형태 자체를 없애려는 시도를 했다(추상미술). 왜냐면 [[십자가]] 같이 간단한 [[상징]] 조차도 미화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들은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 형태'의 묘사를 포기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당시는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대였고, 전쟁과 이념대립에 지친 예술가들은 '이럴거면 그냥 형상 안그리고 점,선,면,색만 그리고 말겠다'라는 생각으로 추상에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당시에 예술가들은 고답적인 고전미술을 그리거나, 아니면 파시즘 찬양 선전, 아니면 공산주의 찬양 선전,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 광고나 그려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순수하게 예술적 자유를 누리며 그리고 싶은 거나 그리고 싶다는 바람이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조각상이나 초상화를 그렸는데 정권이 바뀌어서 파괴되면 착잡한걸 넘어서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입체주의가 피카소 한 사람에 의해 창안된 것과는 달리, 이상하게 추상화가 유럽 여러 지역의 여러 사람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추상화가들이 이렇게 꼴보기 싫은 형상 자체를 배제하면서도 회화라는 매체는 유지하는 쪽으로 갔다면, [[다다이즘|다다이스트]] 들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형식 실험을 했다. 신문지를 오려 콜라주를 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존 하트필드는 이 콜라주 기법을 이용해 당대 나치 독일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이는 아래에 나올 예술의 자율성으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