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덕왕후 (문단 편집) == 사후의 폐위와 복권 == 현덕왕후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인 [[해주 최씨|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1456년]](세조 2년), 처형되었다. [[단종(조선)|단종]]도 일개 왕자 신분인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군|영월]]로 [[유배]]된다. 이 여파로 아버지 권전과 현덕왕후는 각각 [[폐서인|서인]](庶人)으로 격하되고, 현덕왕후의 신위는 [[종묘]]에서 끌어져 내쳐졌다. [[태종(조선)|태종]]도 하지 않았던 패륜 짓을 한 셈.[* [[태종(조선)|태종]]은 친형인 [[회안대군]]이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어도 반란 진압 이후에 죽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태종(조선)|태종]]은 계모 [[신덕왕후]]를 엄청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하는 선에서 그쳤다. 더욱이 [[태종(조선)|태종]]은 [[이방번]], [[이방석]]을 서자로 규정했기에 [[신덕왕후]]를 [[후궁]]격으로 격하시킬 필요성이라도 있던 것과는 달리 [[세조(조선)|세조]]는 "단종은 문종의 자식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라서 딱히 현덕왕후를 격하시켜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세조(조선)|세조]]가 괜히 패륜왕이라고 욕먹는 게 아니다. [[성종(조선)|성종]] 때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교명 등이 불살라지기도 하였다. [[세조(조선)|세조]]가 형인 [[문종(조선)|문종]]의 무덤을 파헤쳐서 현덕왕후의 관을 꺼낸 뒤, 시신을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닷가에 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실제로 이것과 같은 헛소리를 실록에 올려놓은 [[김일손]]은 [[무오사화]]때 아주 제대로 작살이 났는데다가 진짜 이랬다면 다시 현덕왕후를 세조의 형이었던 [[문종(조선)|문종]]과 합장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에 따르면 [[단종(조선)|단종]] 사후 [[세조(조선)|세조]]가 꿈을 꿨는데, 왕자 시절에 사망한 형수 현덕왕후의 혼령이 시동생 [[세조(조선)|세조]]에게 분노하면서 "네가 [[단종(조선)|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세조(조선)|네]] [[의경세자|아]][[예종(조선)|들]]들을 죽이겠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세조에게 환관이 급히 달려와 아뢰기를, [[세조(조선)|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세조(조선)|세조]]가 [[안산시|안산]]에 있는 소릉[* 昭陵, 현덕왕후의 예전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시신을 망치로 부수고 소각해서 강에다가 던지고 현덕왕후 신위를 [[종묘]]에서 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려운데, [[의경세자]]가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3년) [[9월 2일]], [[단종(조선)|단종]]이 사망한 날은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로 오히려 [[단종(조선)|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사망]]하였다. 다만 민간에서도 [[세조(조선)|세조]]가 [[단종(조선)|단종]]과 현덕왕후에게 가한 패륜적 행위가 결코 대중들에게 지지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 정도로는 볼 수 있다. [[성종(조선)|성종]] 때 남효온이 현덕왕후를 복권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나 [[성종(조선)|성종]]은 불허하고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등 반대 여론이 심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중종(조선)|중종]] 때에, 그녀가 살아있을 당시 [[안동 권씨|친정]]이 역모에 관여되었다 하더라도 왕후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폐서인하지 않는 법인데[* 실제로 [[세종(조선)|세종]]의 [[청송 심씨|처가]]인 [[심온]] 일가가 [[태종(조선)|태종]]에 의해 [[역모]]로 몰려 거의 박살이 났음에도 [[세종(조선)|세종]]의 왕후인 [[소헌왕후|소헌왕후 심씨]]는 [[폐서인]]되지 않고 자리를 유지했다.], 이미 죽은 뒤의 일로 연좌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유와 [[문종(조선)|문종]]이 혼자 [[종묘]]에 모셔져 있으니 신하로서 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1513년]](중종 8년) 왕후로 다시 복위되어 동원이강릉 형태로 [[동구릉]] 경내에 있는 '''현릉(顯陵)'''에 다시 안장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나,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비로소 현덕왕후의 복위가 이뤄졌다.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후 벌어진 [[세조(조선)|세조]]의 참혹한 만행 때문에 관련된 야사가 많다. 야사에 따르면 [[유순정]]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앞장서서 반대하였는데, 어느 날 권민수가 숙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현덕왕후의 외손자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와 유순정이 크게 싸우는데, 유순정이 궁색해하는 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순정이 병사하니, 사람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야사에는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는데, 한 [[승려]]가 바닷가에서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놀라 나와 보니, 여자는 없고 빈관만 있었다. 승려는 괴이쩍게 여겨 관을 풀로 덮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바닷가 언덕 중 하나가 되어 아무도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중종(조선)|중종]] 대에 현덕왕후가 복위되자 관을 찾기 위해 언덕을 팠는데,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감역관이 꿈을 꿨는데, 현덕왕후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였다. 감역관이 꿈에서 깬 뒤 땅을 파자 바로 시신없는 빈관이 나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