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상윤 (문단 편집) === 초년시절 === 1893년 6월 14일 [[평안도]] [[정주시|정주목]] 남면통(현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아버지 현석태(玄錫泰)[* 1865. 5. 7. ~ 1917. 3. 23. 아버지는 현은제(玄殷濟).]와 어머니 [[박(성씨)|죽산 박씨]](竹山 朴氏) 박치형(朴治亨)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와 고향이 같다. 이광수보다 1년 늦게 태어났다.] 아버지 현석태는 1892년([[고종(조선)|고종]] 29) 별시 문과에 병과 34위로 급제하고[[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92_014944|#]] 정7품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기로소 수직관(耆老所守直官), 정6품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으며, 근정전에 나아가 [[순종(대한제국)|왕세자]]를 시좌하여 춘도기를 쓰기도 했다. [[경술국치]] 때에는 방성통곡하고 조상과 임금께 큰 죄를 지었다며 한 달 이상을 미음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현상윤은 어려서 30촌 지간의 족형(族兄)인 진암(鎭菴)[* 또는 구암(龜岩).] 현상준(玄商濬)[*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충청북도]] [[제천시|제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독립투사이기도 했다.]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이후 [[평양]]의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하였다. 당시 대성학교의 교장은 [[윤치호]]였다. 그러나 일장기 불게운동과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대성학교가 폐교되자 학업을 중단하였다. 1912년, 20살의 나이로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22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했다. 교비생(장학생)으로 합격하였기 때문에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았다. 재학시절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으며, 특히 한문실력이 뛰어나서 교수에게서 100점 만점에 120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 [[김성수(1891)|김성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장덕수]], [[홍명희]], [[정인보]],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신익희]]와 친하게 지냈다. 1917년 동경유학생 구국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모두 6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 그 이후 문학가로서 전혀 활동하지 않아 그의 단편소설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소설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우리 근대 단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실제로 직접 읽어보면 요즘 소설이라고 말해도 믿을 만큼 문체가 매우 세련되고 간결한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3월, [[와세다대학]] 문학부의 사학-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논문 '동서문화의 비교연구'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도쿄대학|도쿄제대]]학보에 게재되었을 만큼 그 내용이 탁월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