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상윤 (문단 편집) === [[고려대학교]] 총장 시절 === 1946년 2월에는 경성제국대학 예과부장을 사임하고,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보성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총장이면서도 매주 교양 강좌를 통해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좌우 대립으로 혼란스럽던 상황이었으나, 이념과 관계없이 교수로서의 능력이 있다면 보호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우파적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좌파 지식인의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교수들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개방적이면서도 학구적인 대학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총장 시절 공사 구분이 엄격했으며 지독히도 청렴했다고 한다. 봉급을 올릴 때 자기 봉급은 전혀 올리지 않고, 교수들과 직원들 봉급만 올렸으며, 총장용 승용차는 업무에만 이용하고 출퇴근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1949년 12월에는 저서 '조선유학사'를 발간하였다. 1950년 1월에는 '한글전용 어떻게 보나'라는 토론회에 참석하여 한글전용 운동에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낙원동 인근에 은신하다 8월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때 탈출이 용이하여 함께 수용되었던 인사가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공산당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두고 어쩌겠습니까? 사상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죽이겠습니까? 그들이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공산당을 우리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탈출하지 않으렵니다. 얼마 있지않나 북한으로 끌려가던 도중 9월 15일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유해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필생의 저서 '조선사상사' 원고는 당시 출판사에서 조판중이었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1949년에 출간한 저서 '조선유학사'로 나중에 [[고려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하지만 현상윤 본인은 정작 자신의 박사학위증을 만져보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학위심사를 통과한 1953년은 이미 납북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상윤 박사의 학위수여식은 궐석으로 진행되었고, 학위증을 낭독하던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는 오열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박사 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다. 고려대에서 학위 수여를 결의하고 문교부의 승인을 받은 것은 1952년 12월 31일이지만, 이미 1952년 4월 26일 서울대학교 학위수여식(졸업식)에서 전풍진 등 6명에게 이학박사(3명), 의학박사(1명), 문학박사(2명) 학위가 수여되었다. 이 중에는 [[이병도]]도 포함되어 있다. 같은 날 동시수여되었으나 학위번호가 1번으로 가장 빠른 전풍진 박사가 대한민국 1호 박사 타이틀을 갖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