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왕(주) (문단 편집) === 손빈과 방연의 대결 === 현왕 12년(기원전 356년), [[제위왕]]은 현명한 선비 [[추기]](鄒忌)와 [[전기(전국시대)|전기]](田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실행해 제나라가 날로 강성해졌다. 이 당시 위나라에 있었던 [[손빈]]이 방연의 견제로 [[니트족]]으로 있다가 제나라의 구출을 받아 제나라로 되돌아왔다. 현왕 16년(기원전 353년), [[위(전국시대)|위(魏)나라]]의 혜왕은 방연을 보내 [[조(전국시대)|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을 치니 조나라에서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제 위왕은 대장으로 전기, 군사로는 손빈을 보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이때 손빈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 원래 수도가 안읍이었다가 진(秦)나라의 파상 공세로 인해 이 대량으로 옮긴 까닭에 [[위혜왕]]이 양 혜왕이라 불린다. 애초에 위에 언급된 왕이 위 혜왕이 아닌 양 혜왕이라 불리는 것도 그 까닭.]이 비었음을 간파하고 전기에게 대량을 칠 것을 권하니 전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하여 위군은 대량을 지키기 위해 허둥지둥 돌아오는데, 제나라가 계릉 땅에서 매복해 위군을 말 그대로 [[개발살]]을 냈다. 그리하여 조나라의 포위가 풀렸다. 이 전투를 [[계릉 전투]]라고 하며,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한다는 고사이다. 현왕 18년(기원전 351년), 한나라는 최약체였으나 한 소후가 [[신불해]](申不害)를 등용하여 강성해져 갔다. 현왕 28년(기원전 341년), 방연이 한나라를 치니 한나라에서 구원을 요청했고 제나라 측에서는 전기를 대장으로 전영(田嬰)[* 바로 그 유명한 [[전국사군자]]인 [[맹상군]]의 아버지다.]을 부장으로 삼고, 손빈을 다시 군사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리고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에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쓴 방법처럼 역시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치니 혜왕은 태자의 군대를 되돌아 오게 했다.[* 그런데, 왜 수도를 비울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길이 없다. 그 나라를 압박하려 했는지 먹으려 했는지는 불명. 진실은 저너머에.] 그러나 방연은 손빈의 계략에 넘어가[* 방연은 제나라가 겁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방연과 친구였던 손빈이 그것을 알고 일부러 아궁이를 적게 파서 병사들이 탈영하는 것처럼 속여서 유인했다고 한다.] 마릉에서 제나라 군사들이 어지러이 날리는 화살과 쇠뇌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말했다. "내가 그 [[손빈|변변치 않은 놈]]의 이름을 떨치게 해주었구나." 이 전투를 [[마릉 전투]]라고 했다. 그 뒤 손빈은 사표를 내고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국지]]》에 의하면 귀곡자를 따라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리 없다.[* 《열국지》가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삼국지연의》보다 허구가 적은 편이지만,(《사기》와 비교했을 때.) 이런 비현실적인 일과 [[조양자]]가 사실보다 빨리 죽은 일 그리고 상앙이 있을 때 위나라 왕이 양 혜왕이 아닌 위 양왕의 일이라고 언급하는 등의 일은 허구다.] 이것은 그만큼 전국시대에 각 국가들이 얼마나 부국강병을 추구했으며,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렀는지 알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