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정건 (문단 편집) === 초년기 === 현정건은 연주 현씨 24세손인 현경운(玄擎運)과 완산 이씨 이정효(李貞孝) 사이에 5남 중 3남으로 대구 [[중구(대구)|중구]] 상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조선 중기 이래 잡과를 통해 역관, 의관 등을 다수 배출한 중인 집안인 천녕 현씨였는데, 20세기 초엽에 양반 가계인 연주 현씨로 통합되었다. 그의 출생연도는 자료마다 다르다. <현경운의 민적부>,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887년생으로 기재되었고, <대동보(大同譜)>에는 1892년생으로 기재되었으며, <현정건 신분장 지문원지>, <요시찰인 명부>, <한국민족운동사료>에는 1893년생으로 기재되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의 현정건 별세 기사에 딸린 약력에는 1896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생일 역시 자료마다 각기 다르다. 학계에서는 그의 생년이 1893년이며 생일은 6월 29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다. 부친 현경운은 대구전보사 주사를 역임한 하급관리였고, 큰형 현홍건(玄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활동하다 귀국하여 육군 부위(副尉)로 임명되었고, 학부(學部) 교관과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의 통역관을 지냈다. 둘째 형 현석건(玄奭健)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판사가 되었다가 대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또한 현정건의 밑으로는 유명 소설가 [[현진건]], 현성건(玄聖健)이 있었다. 현정건은 13살 때 서울로 상경하여 숙부 현영운(玄暎運) 집에 기거하면서 배재학당을 다녔다. 현영운은 일본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한 뒤 귀국하여 박문국 주사를 거쳐 중추원 의관, 군부 협판, 일본주재 특명전권공사, 육군 원수부 검사총장 등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또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와 결혼해 친일 관료가 되었다. 현영운은 배정자와 1년만에 이혼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총애를 받아 1905년 농상공부 협판과 서리대신, 1907년 태복사장(太僕司長)으로 승진했으며, 고종의 측근으로서 정부의 동정을 일본 쪽에 밀고했다. 그런 그의 집에 현정건이 기거하면서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 1910년, 현정건은 자신보다 2살 어린 파평윤씨 윤덕경(尹德卿)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해에 아내를 남겨두고 혼자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가 갓 결혼한 아내를 내버려두고 상하이로 망명한 까닭은 확실하지 않다. 대한제국이 [[한일병합]]으로 망한 것에 울분을 느꼈거나, 해외 유학에 열망을 느꼈거나, 원치 않은 결혼에 대한 불만 심리가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재종형 [[현상건]]이 일본 정부에 의해 친러파로 지목되자 상하이로 망명한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