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정건 (문단 편집) === 상하이 === 상하이로 건너간 현정건은 재종형 [[현상건]]의 집에 기거하며 영어전수학교를 다녔다. 영어에 숙달한 그는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회사 Mission Book Company에 취직하여 한인 청년, 학생들의 미국행 도항 편의를 위해 기선회사와 여권당국에 교섭하는 일을 했다. 현정건은 이후 10년 동안 고향에 잠깐 방문하거나 1919년 [[3.1 운동]] 직전 한 차례 밀입국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상하이에 머물렀다. 재종형 [[현상건]]은 대표적인 친러파 인사로 [[이용익]]의 측근이었고 [[러일전쟁]] 발발 직전엔 대한제국이 양측 모두와 손을 잡지 말고 중립을 선언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으며, 상하이 망명 후에는 [[민영익]]과 협력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항일 의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6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종래 강경 배일주의자였던 그가 사업 기타 각종 사건 관계로 당관(當館)의 원조를 적잖이 받은 결과 "2,3년래 늘 당관에 출입하면서 배일운동자 내지 미국으로 망명한 조선인 등에 관해 참고할 만한 정보를 누차 제출해 오고 있다"고 한다. 현정건은 1917년 2월 현상건의 집을 나와 상하이의 구강로(九江路)에 거주했는데, 이것은 재종형의 변절에 실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18년 아우 현진건을 상하이로 불러 1년 동안 함께 지냈고, 현진건은 상해 호강대학(滬江大學) 독일어 전문부 1년을 다니다 귀국했다. 이후 1919년 2월 모종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내로 밀입국해 서울로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3.1 운동]]이 한창이던 3월 중순에 석방되었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밀입국한 것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석방된 뒤 모(某) 부호로부터 5만원 가량의 독립운동비를 받으려 했지만 손모(孫某)라는 청년이 먼저 찾아와 3만원을 받아가 버려서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7월 상순경 길림 방면으로 탈출하여 일시 체류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온 현정건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회기 중에 경상도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5회 회기 중에 경상도 의원으로 피선되었던 [[김창숙]]과 [[윤현진(독립운동가)|윤현진]]이 해임되어 결원이 생기자 그가 뽑힌 것이다. 하지만 9월 11일에 그를 의원직에서 해임하라는 청원이 접수되었고, 그는 회기 종료 전에 해임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