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정건 (문단 편집) === 고려공산당 === 현정건은 1920년경 한인공산당에 가입한 뒤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초 임시정부 간부들과 갈등을 빛은 [[이동휘]] 등 한인공산당 인사들은 정부조직좨신안이 수용되지 않음을 이유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전한공산당대표회'를 소집했다. 이때 현정건도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신당 창립에 동참했다.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창립되었을 때, 그는 ‘혜성(慧星)’이라는 필명으로 국한문 활자판 주간지 <화요보(火曜報)>의 주필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사상의 선전과 보급에 노력했다. 1922년 1월 6일자 일본 육군성 밀보에 따르면, 현정건은 프랑스 조계에서 김립과 같이 거처를 감추고 활동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2년 2월 11일, [[김립 피살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김구]]가 부하인 [[오면직]]과 [[노종균]]을 보내 김립을 암살하게 한 것이었다. 현정건은 아마도 이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상해파 공산단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통합을 촉구하는 목적의 비밀회의가 2월 초 상하이에서 열렸다. 그는 이르쿠츠크파의 [[안병찬]], 상해파의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와 함께 이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그해 10월 19일에는 베르후네우딘스크에서 고려공산당 합동대회에 '상해 공산단체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분쟁이 너무도 심각했기에 대회는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이에 실망을 금치 못한 코민테른 당국은 12월에 양파 공산당 모두 해산하도록 지령하고, 극동부 산하의 꼬르뷰로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설치했다. 그 결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상해지방간부회가 활동을 정지하고 해체되었고, 상해파 공산당도 다수 당원들이 국내로 귀환하거나 탈당했다. 하지만 현정건과 [[윤자영]] 등은 상하이에 남아서 자파의 혁명전략과 조직 명맥을 이어가고자 했다. 1922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기력에게 쏟아지는 질타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던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국민대표회의가 기존의 임시정부 개조 요구를 관철시킬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현정건, [[왕삼덕]]을 고려공산당 대표로 임명해 이 회의에 파견했다.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에서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총 74회에 걸쳐 국내외 지역 독립운동 단체 대표 125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제동이 걸렸다. 꼬르뷰로가 통일에 실패한 고려공산당 양파가 각각의 대표를 파견한 것은 잘못이라며 소환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파 대표들은 소환령에 순응하여 1월 9일 회의에서 퇴석통지서를 제출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하지만 상해파는 꼬르뷰로의 소환령을 거부하고 국민대표회의에서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했다. 그는 영어와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능통하여 2월 5일 열린 외교분과위원회에서 [[여운형]], 윤해(尹海) 등과 함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임시정부 폐지를 역설한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대체할 조직으로 국민위원회 구성을 일방적으로 공표하자, 개조파의 국민대표 57인이 창조파와 국민위원회를 규탄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6월 3일에 발표했다. 현정건은 이 성명서에 [[왕삼덕]]과 함께 공산당 대표로 서명했다. 이후 그는 1923년 7월에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썼지만 끝내 양측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 한편, 현정건은 1923년 8월에 국내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상해교민단이 내지동포 수재구제회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1924년 4월 5일 청년동맹회가 결성된 뒤 10월 4일 임시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집행위원 11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임시총회에서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 내용에 의열단원들이 격분했다. 자단의 운동노선을 '공포론'이라 지창하면서 정당성을 부당하게 폄하했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의열단이 청년동맹을 문건으로 맹비난했고, 일부 간부들이 윤자영과 [[김규면]]을 찾아가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의열단은 윤자영과 현정건이 청년동맹회를 빙자하여 일본 공산당에서 금전을 받아 유용하고 있다는 악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청년동맹회는 '금전' 건의 당사자 윤자영과 현정건 2인에게 제명 조치를 내리고 감사부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했지만 사실무근임이 판명되었다. 얼마 후 의열단장 [[김원봉]]이 청년동맹회를 찾아와 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했고, 금전 관련 유언비어도 잘못된 것임을 시인했다. 이에 윤자영과 현정건은 즉시 복권 조치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통의부 중앙파와 이반파의 대립이 심각하던 중 [[이동녕]] 국무총리 휘하의 임시정부가 <독립신문>으로 하여금 통의부 중앙파를 비판하는 일이 벌어지자, 청년동맹회는 격분했다. 이에 윤자영, [[김상덕]], 현정건 등 청년동맹회 간부급 회원들이 1924년 10월 하순에 임시정부 학무차장 겸 독립신문사 사장인 [[김승학]]을 습격하여 구타하고 임시정부에게 내각 개조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11월 17일자로 내각 개편이 이뤄져 [[박은식]] 국무총리 겸 임시대통령 대리 체제가 출범했다. 1925년 4월, 청년동맹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 임원개선 및 조직 개편이 있었는데, 현정건은 7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신설된 조사부의 위원으로도 선임했다. 그는 1925년경부터 ‘현읍민(玄揖民)’이란 이명(異名)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읍민’이란 별칭 또는 호는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백성 또는 국민에게 읍을 한다’, 즉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 예를 표하고 겸손하고 사양하며 국민을 공경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독립사상 고취를 위한 잡지 발간, 강연회 개최, 인쇄물의 국내 밀송 배포 등 선전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인성학교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를 담당하여 한인 학생들을 가르쳤고, 1926년에 조직된 중국사정연구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인 청년들의 중국대학 및 군관학교 입학 주선과 자격심사를 주관했다. 그러나 1926년부터 청년동맹회의 활동이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윤자영, 이화천, 최천호 등 유력 간부들이 만주나 국내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며 청년동맹회를 떠났고, 1927년 3월 10일 상해한인청년회 발기총회 자리에서 청년동맹회가 임시회의를 열어 자진해산을 결의했다. 이는 개조가 청년동맹회를 결성해 임시정부개조를 추진했으나 성과와 결실이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자 청년동맹회 내 상해파가 사회주의 운동노선을 부각시켰고, 이에 대한 반발이 일자 청년동맹회를 이탈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