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당) (문단 편집) === 대[[토번 제국|토번]] 전쟁 === 이 시기의 [[토번 제국]]은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시기였던 696년 [[가르친링]]이 소라한산 전투에서 무주군을 대패시킨 뒤 [[무주(당나라)|무주]]에 이렇게 제안하였다. >'''안서 4군을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을 반 잘라서 나누는 것이 어떠한가?''' 그 정도로 토번의 위세가 강성하였으나, 무측천은 가르 가문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거절한다. 그 이후 699년 가르친링이 [[토번 제국]] 내부의 반란[* 토번의 첸뽀 [[치둑송첸]]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가르 가문과 톤미 가문을을 숙청하였다.]으로 인해 숙청당하면서[* 가르친링과 그의 동생 [[가르다고리]]가 자결한 뒤,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찬파]]와 가르친링의 아들 [[가르궁린]]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무측천으로부터 논씨 성을 하사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파는 죽고 가르궁린은 당나라의 명장으로 활약했다.],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후 국망포지가 당나라를 공격하나 당휴경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개원 초기(710년대) 토번은 상당히 강성했던데다가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공주[* 이렇게 정략적인 이유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공주를, 중국에서는 [[화번공주]]라 불렀다.]의 [[탕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 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 이 건의는 '''[[토번]]의 뇌물을 먹은''' 양주 도독 양구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데 성공한 토번군이 714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에 상당히 다혈질이던 당현종은 기존의 농우 일대의 병력에 추가해 병력 100,000명과 군마 40,000필을 추가로 징병하고, '''토번으로 친정'''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뒀다.], [[설눌]]이 이를 격파했다. 그 뒤 [[실뤄라]]가 감숙성 일대를 공략하여 당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나 [[소숭]]의 이간계[* 토번 조정에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로 인해 제거당하고 말았다.[* 토번 측 기록에는 낙향했다고 되어 있지만 《자치통감》에는 암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군제 재정비를 끝낸 당 제국은 점차 [[토번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동시에 역공을 퍼붓으면서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으며, 729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었던 석보성을 삭방절도사 이의[* 농서 이씨 황족이었지만 현종의 형제는 아니었다.]가 완전히 점령했다.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당 제국과의 전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했다. 이후 737년에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했고, 요충지인 석보성을 741년에 토번에 다시 빼앗겼지만, 당 제국은 또다른 요충지인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했다.[* 이는 검남절도사 [[장구겸경]]에 의한 것이었다. 토번 제국과 남조국 간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749년 [[가서한]]이 석보성을 재정복한 데 이어[* 성을 지키는 토번군은 수백 명인 반면 당군은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753년에는 이전 토번에 넘겨주었던 하서구곡 지역을 수복하는 등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토번 제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