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당) (문단 편집) ==== [[개원지치|개원성세]] ==== 이 시기 현종을 보좌한 유능한 재상으로는 [[요숭]], [[송경]], [[장가정]], [[장열]], [[이원굉(당나라)|이원굉]], [[두섬]], [[한휴]], [[장구령]][* 당시에서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고, 안녹산의 야심을 간파했다. 참고로, 이 순서는 재상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시대순이다.'''(...)] 등이 있는데, 요숭과 송경은 개원지치의 초창기를 빛낸 명재상으로서 [[정관지치]]를 보좌한 방현령ㆍ두여회와 비견될 만하여 '방두'(房杜)라는 표현과 함께 '요송'(姚宋)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였다.[* 요숭은 제한이 "공은 당대의 문제를 구해낼 수 있는 재상이다."라고 하니까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무진장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이란 뜻의 '''구시지상'''이다.] 한휴는 현종에게 자주 간언하여 좌우의 지지 세력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잔소리꾼[* 이때 현종의 대답은 전형적인 [[명군]]의 발언이었다. '''"짐은 말라 야위었으나 천하의 신민들은 반드시 살이 올랐을 것이다. 내가 한휴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이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 발언이 나온 건 개원 21년(733)이었다.]이었다. 그 외에 유명한 정치가로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정국을 길게 주도했던 [[원건요]],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우문융이 있었다.[* 단, [[뇌물]]을 밝히는 게 심해서 우문융은 재상직에는 올랐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단순히 이러한 유능한 재상들의 목록만 놓고 본다면 '부하를 잘 둬서 명군'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의 강력한 황권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부하들은 현종을 보좌하는 자들이었고,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는 황제 현종이었다. 즉, 개원성세를 실현해 당나라가 직면했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최종적인 공로는 현종에게 있었던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화적법>'''이다. 이 법은 추수기에 중앙 정부에서 강남 등 곡창 지역의 곡식을 시가의 2~3할 정도 더 높게 처서 사들여(화적) 이를 각지의 군진들에 직접 공급하고, 빈번이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수도권 관중 지역[* 당나라는 수도를 장안에 잡고도 자주 부수도(동도)인 낙양으로 정부가 움직이곤 했는데, 이는 관중 지역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에도 공급하는 제도로, 기존의 지조[* 농민들이 직접 부담.]와 영전[* 군사들이 [[둔전]]을 행함.]을 대체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식의 괜찮은 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데 성공한 공적은 결국 현종에게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