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당) (문단 편집) ==== 천보난치 ==== 그러나 이런 태평성대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향해가자 명군이었던 현종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부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내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당 제국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했고 천보 연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절도사직 10개가 설치되면서 군사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736년에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명신 [[장구령]][* [[고제(전한)|한고조]]를 보좌했던 [[장량(전한)|장량]]의 후손이었다. 또한 생전에 [[안녹산의 난]]을 우려하여 안녹산에 대해 현종에게 경고를 보낸 인물이기도 했다.]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돌았다. 그리고 737년, 현종은 수왕 이모를 태자로 세우려는 [[정순황후 무씨|무혜비]]와 이임보의 공작에 넘어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738년에 3남인 충왕 이형(훗날의 [[숙종(당)|당숙종]])으로 황태자를 교체했다.[* 무혜비와 이임보의 의도와 달리 이영이 사사되고난뒤 서장자인 1남 경왕 이종(화비 유씨 소생)이 있었으나 신하들중에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서 충왕 이형이 사실상 장자취급이었고 현종의 최측근인 환관 [[고력사]]의 지지로 충왕 이형이 태자가 된다.] 게다가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황제였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는 검소함이 사라지고 화려한 황제의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 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 정복전쟁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인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72개 국가를 정복하는 등 당나라의 팽창주의를 이어가면서 영토가 크게 넓어져 당나라가 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력이 목숨을 잃고 국고가 궁핍해진 데다가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아바스 칼리파조와 같은 강대한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재[* 당현종 천보(天寶)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결론적으로 당숙종의 건원(乾元) 원년부터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안사의 난]]이 연달아 발발하면서 대규모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참고로 [[탈라스 전투]]로 인해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로인해 지금껏 잠들어있었던 유럽은 깜짝 놀라기 시작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탈라스 전투]] 항목 참조. 다만 당 제국은 탈라스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인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정복하는 등 안서도호부의 강역을 더욱 더 확대함으로써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했다. 《[[자치통감]]》에도 서역에 미치는 당나라의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나와 있다.]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당)|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집단]]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빈천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과거제로 입문하여 개원성세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로 인해 양씨 일가가 전횡하게 되었고, 이에 권력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조정 신료들과 절도사 사이 및 여러 절도사들 간의 모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안녹산]]과 [[안사순]][* 여기서 안사순은 안녹산과 사촌관계였는데, 안녹산이 역적인 반면 안사순은 [[설눌]] 밑에서 토번군을 격파한 이래 하서절도사를 지낸 데 이어 삭방절도사로 재직하던 와중 [[정천리]]와 협공하여 이헌충을 격파하는 등 당나라의 국경 수비에 주력하고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리는 등 당나라의 충신이었으나, 안사의 대란이 일어나자 조정으로 소환되어 호부상서가 되었고 이후 가서한의 무고로 동생 안원정과 함께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 평정 뒤 명장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었다.], [[가서한]]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고, 양국충과 안녹산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 그것이다. 이때 이임보는 지금까지 장성 안쪽의 내지 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장군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고 있었는데[* 그 이전 이민족 출신이 절도사를 담당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강족 출신으로, 고구려 출신 번장 [[고선지]]에게 욕을 한 것으로 유명한 [[마영찰|부몽영찰]]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군사력이 급성장한 탓에 마치 중세 봉건제 제국처럼 흘러가게 되었고, 중앙군은 부패해지면서 빈약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임보 사후 동북변의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던 [[안녹산]]이 국경의 정예 병력들을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군대가 되었고 755년 [[안사의 난|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켜]] 수도 [[시안(도시)|장안]]까지 침공했다. 노쇠한 현종은 사천을 향해 퇴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임보가 권력을 잡은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퇴각을 하던 중에 이게 다 [[양귀비]]와 [[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서('''마외병변'''), [[양국충]]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양귀비]]는 군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와 양국충이 목숨을 잃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천에 퇴각해 있는 동안에 다른 영지에서 분조를 이끌고 있었던 황태자가 군인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당)|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제와 황태자 간의 내전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황태자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