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현종은 보통 유약하다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아버지 대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조선)|효종]]은 왕비 [[인선왕후]]와의 사이에서 3남 7녀를 두었으나 이 중 현종의 누나 1명(숙신공주), 형 1명과 남동생 1명, 여동생 1명은 일찍 죽었고 실질적으로 장성한 자녀들은 1남 5녀였다. 이 중에서도 현종은 위로 5살, 1살 차이 나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도 4명의 여동생들이 있었는데[* 효종의 막내딸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와 현종의 나이 차이가 무려 8살이다.] 이렇게 [[누나]]들과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났던 현종은 [[가족]] 덕인지 상당히 온화한 [[성격]]이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유약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누나들과 여동생들이 대부분 [[여걸]]에 가까운 성격이기 때문이다. * [[효종(조선)|효종]]의 [[부마]]였던 정재륜[* 즉, 현종의 매형.]이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야사(역사)|야사]] 공사견문록을 보면 현종의 소소한 일화들도 적혀 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저자 정재륜이 효종의 부마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책이므로 신뢰도는 낮지 않을 것이다. 정재륜(1648년 ~ 1723년)은 효종의 4녀인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정태화]]이다.[* 다만 족보상으로는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의 양자로 들어갔다. 정치화 역시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친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집안과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가 부마가 된 것도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부마 재혼 금지 법제화'''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 대에 [[숙정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죽자 전례를 들어 재혼을 청했는데, 거절당하고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만 법제화되었다. 정재륜의 후사는 종손(從孫) 정석오를 죽은 외아들의 양자로 들임으로써 잇게 됐다. 조선 전기 [[정인지]]의 차남 정현조는 [[세조(조선)|세조]]의 부마가 되었으나 공주가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자 재혼했다는 걸 보면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서 재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 당시 궁궐에는 [[광해군]]의 후궁인 허씨를 모셨던 조씨 성의 상궁이 있었는데 조상궁은 현종의 조부인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현종이 탄생한 후 조 상궁이 현종의 보모가 되었는데,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인조반정|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불로써 나라를 얻은 것'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건 그야말로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대는 말이다. 현종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뒷날 즉위 후 조 상궁을 불러서 그 일을 거론하며 "내가 그거 그냥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만 있었다"고 타이른 후 조 상궁을 출궁만 시키고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았으며 조 상궁이 죽을 때까지 식량도 계속 대주었다고 한다. *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 [[한양]]의 서쪽 성곽 부근을 말한다. [[영은문]] 근처로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당대 중국 사신의 전송, 전별연을 주관하던 모화관이 있던 지역.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이다. --마포구 서교동이 아니다! 지금이야 독립문에서 서교동으로 이동하기 수월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금화터널이 없었다--]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나라 사신이 떠난 후 한 병사가 빨리 걷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현종과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주위에서 이 병사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라며 곤장 대여섯 대를 치는 것으로 퉁치고 끝냈다고 한다. * 세자 시절에는 효종에게 새끼 [[곰]]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이 곰을 궁에서 길렀는데, 1년 뒤 곰이 크게 성장해서 사람 말을 안 듣자[* 사실 곰은 잘만 다루면 사람 말을 잘 듣게 할 수 있다.(현대에도 가끔씩 곰과 함께 사는 집이 나오곤 한다.) 다만 이 당시에는 그걸 몰랐거나 그럴 재주가 없어서 못한 듯] 내시가 "오래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청해서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현종은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라며 곰을 야산에 놓아줄 것을 청했다. 효종은 현종을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이라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 치세에는 [[예송논쟁]]의 대립이 격화되긴 했어도 현종의 중재와 교통 정리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이가 삼수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당한 [[윤선도]]. 그리고 그 윤선도조차 제위 후반기에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시켜 고향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게 해주었다.~~문제는 아들이 이 성격을 못 물려받았다.~~ * [[http://sillok.history.go.kr/id/kra_200001|《현종실록》의 현종 행장]]에 의하면 할아버지 [[인조]]가 살아있을 때 [[표범]] 가죽을 인조에게 바친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범 가죽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도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는데, 당시 세손이었던 현종이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표범 1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표범 가죽을 받았다고 한다. * 서인들이 허적을 공격하는 소가 올라오면, 온화한 현종도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 탄핵소를 들어온 자들을 파직과 유배를 때렸다. 현종이 서인과 남인을 서로 견제하게 하는 편이 그나마 왕권이 자리 잡을 공간을 만들어 줄까 생각한 것이다. * 현종은 [[효종(조선)|효종]]과 [[인선왕후]]의 외아들로 위로 누나가 2명, 아래로 여동생이 4명 있었다. 7남매 중 유일한 외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을지 쉽게 짐작된다.[* 그렇다고 [[효종(조선)|효종]]과 [[인선왕후]]가 아들 딸 [[차별]]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현종이 유일한 [[왕세자]]이니 정말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다른 누이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은 듯하지만[* [[숙안공주]]와 [[숙정공주]]가 [[안하무인]]격에 [[정치]]에도 관여해서 [[사대부]]의 비난을 받았는데 효종과 현종이 공주들을 적극 보호했다.] 《숙명신한첩》을 보면 유독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와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1살 위인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가 [[왕실]] 사람들과 나눈 서간첩인 《숙명신한첩》을 보면 현종과 나눈 [[편지]]도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 놓고 한 쪽 귀퉁이에다가 여동생들인 [[숙휘공주]]와 [[숙정공주]]에게 보내는 추신을 적어 두었는데 "(너희들이) 악착스럽고 독하게 편지 1장을 보내라고 해서 이렇게 쓴다"고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왕도 일개 [[오빠]]몬이었다.-- * 《공사견문록》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나 괴팍했던 아들과는 달리 온화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특히 조 상궁과의 일화는 거의 [[대인배]] 인증. 조 상궁의 발언은 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그녀가 보모상궁이였다고는 해도 이는 역모죄로 처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정통성 문제 때문에 골칫덩어리(스트레스)를 엄청나고 심하게 압박받았던 부왕 효종에게 알려졌다면 바로 목이 댕강 달아나고도 남을 그럴 상황. 실제로도 조 상궁 아니, 그 이상의 행위를 벌였다고 할 수 있는 김홍욱의 경우[* 이 사람이 뭘 했냐면 효종 5년 구언의 전교를(뭔 소리냐면 재난이 일어난건 왕 탓이니 쓴소리 좀 해 봐라 '''벌 안 줄테니''') 내리자 '''[[민회빈 강씨|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통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효종에게는 본의는 아니지만 [[역린|제대로 아픈곳 찌른 셈]]이었다.] 국문 당하여 곤장을 맞다가 사망했다. * 《[[현종실록]]》은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이 개수(改收)된 경우다. [[http://history21.egloos.com/612121|#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의 차이]]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민점(閔點) 등의 [[남인]] 인사 주도로 숙종의 독촉하에서 [[1677년]](숙종 3년) 완성된 것이 <현종실록>이라면,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을 내었다. 이 개수실록은 부실하게 지어진 <현종실록>을 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진 만큼 처음부터 갈아엎었고, 기록도 <현종실록>보다 훨씬 길다. * 역대 [[계후]]가 없는 조선 국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들이지 않고,[* [[경종(조선)|경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도 후궁이 없었지만 이쪽은 적어도 계후는 있었다.] 중전인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 [[명성황후 민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에게만 충실했다. [[부부]]간의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명성왕후가 [[태종(조선)|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처럼 워낙 성깔 있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태종은 ([[무안대군|이복]][[의안대군(이방석)|동생]]들을 [[제1차 왕자의 난|죽이고]] [[회안대군|동복형]]을 [[제2차 왕자의 난|제압할]] 정도였으니) 마찬가지로 그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던지라 수많은 후궁을 들였다는 것.][* 사실 현종 재위기간 내내 친어머니이자 왕대비 인선왕후가 살아 있었으므로 명성왕후도 시어머니인 인선왕후의 눈치를 봐서 마냥 대놓고 후궁 들이는걸 반대하거나 할순 없었지만 명성왕후의 친가가 워낙에 권세있는 명문가였기 때문에 인선왕후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명성왕후]]는 [[숙종(조선)|숙종]] 재위 시절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이자 자신에게는 (법적) 시조모인 [[장렬왕후]]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서인]]집안 출신의 [[인현왕후]] 간택을 거의 독단적으로 강행하고, [[장렬왕후]]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를 내쫓기도 했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 [[숙종(조선)|아들]]은 물론, [[경종(조선)|두]] [[영조|손자]], [[사도세자|증손자]], [[정조(조선)|현손자]], [[순조|내손자]]든 간에 현종 아래로 그 성품들은 아내였던 [[명성왕후]]를 빼박 닮아 다들 성질이 한성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과로 인해 조선 역사상 [[임오화변|왕이 세자를 죽이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이었다고 한다.[* 이 온화한 성품을 그나마 많이 닮은건 장손자인 [[경종(조선)|경종]] 정도로 추정된다. 이 경종의 경우에는 사실 되려 신하들이 임금열외를 시킬정도로 본인을 무시한 점이 실록에 등장하기까지 한걸 감안하면 다혈질을 타고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화가 많아도 이상하지 않은 쪽인데 되려 많이 참다가 터트린걸 감안하면 숙종의 아들들 중 할아버지의 성품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온화한 현종이라도 경종때처럼 신하들이 자신을 기수열외 시키듯이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으면 화를 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경종은 세자 시절 어머니인 [[희빈 장씨]]를 잃은 시점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가 세자 말년엔 정비인 [[단의왕후]]까지 떠나보내고, 왕이 되고난 후에는 앞서 서술한 고난까지 겪은 영향 때문인지 할아버지 현종보다 겨우 2년 더 산 35세로 단명하고 말았다.] [[정종(조선)|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두었는데 첫 딸은 [[아기]] 때 [[사망]]했고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 당시 둘 다 [[부마]]를 정해 놓고 봉작까지 내린 때였는데 [[1673년]](현종 14년)에 두 [[공주]]가 4개월 간격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공주들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선공주의 경우 사망 1주일 전 《[[현종실록]]》 기사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공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부마들의 작호를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그 결과 길일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한 명혜공주의 부마는 작호를 환수하고 혼례일이 잡힌 명선공주의 경우는 작호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부마 [[재혼]]을 금하는 법례 때문에 명선공주의 부마가 평생 재혼하지 못하고 늙을 판이 되자 현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이마저도 다시 환수하도록 명을 내려준다.]했고 [[숙종(조선)|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여 혼인[* 다만 현종은 명안공주가 [[시집]]가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안공주는 [[1680년]](숙종 6년) [[2월 18일]]에 전 공조참판 [[해주 오씨|오두인]]의 아들 부마 오태주와 혼례를 올렸다.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던 [[숙종(조선)|숙종]]이 이 날도 승지를 보내 [[술]]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아 있다. 오태주의 아버지 오두인은 훗날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화를 사 모진 형신을 받고 [[의주군|의주]]로 귀양가는 도중 고문 후유증으로 [[파주시|파주]]에서 객사한다.]을 했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1687년(숙종 13년) 5월 16일에 20세의 나이로 [[요절]].[* 오원은 시동생 오진주의 아들로 공주 사후 들여온 [[양자(가족)|양자]]이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조선 왕실]]에서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조선)|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조선)|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조선)|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갔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들면서 조선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왕녀들은 시집가서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보지 못하거나 자식을 낳아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조선)|경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 황제]]는 일단 빼고 [[정조(조선)|정조]]와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았으나 나중에 대가 끊기거나 요절했고 [[숙종(조선)|숙종]],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의 딸들은 대부분 요절했다.[* 그나마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는 77살까지 살았지만 덕혜옹주도 딸 하나만 낳았고 그마저도 24살의 나이에 유서를 남기고 행방불명 되었다. 결정적으로 덕혜옹주가 태어났을 땐 나라가 이미 망한 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