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협차사격 (문단 편집) ==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 == || [youtube(s1i-dnAH9Y4)] || || 미 해군의 기계식 사격통제컴퓨터 훈련 영상. Circa 1953 || [[전간기]] 전함, 특히 레이더와 사통장치가 충실한 후기형 미군 전함들은 [[레이더]]와 연동된 기계식 사격통제컴퓨터를 탑재해 신속한 사격제원을 도출하였으며 화기 관제 레이더의 도입으로 광학으로 관측하기 힘든 환경에서도 목표 추적과 포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시야 밖으로 넘어가는 포탄의 탄착점도 관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므로 큰 변화였다. 덤으로 [[대기권]]에서의 전파 [[굴절]] 현상으로 인해 광학보다도 조금 먼 거리의 목표도 파악 및 측정이 가능해졌다. 수평선 너머라서 잘 안보이는 목표도 수평선에서 10km 정도로 살짝 떨어진 상태라면 레이더로 측정이 가능해진 것이다. 기존의 광학장비를 이용한 사격통제장치의 경우에는 날씨가 흐리기만 해도 측정가능한 사정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안개가 끼거나 적함이 [[연막]]을 살포하면 측정 자체가 불가능해졌으며 야간에는 [[탐조등]]과 [[조명탄]]을 써도 광학장비로 들어가는 광량이 부족해서 사실상 무쓸모한 존재로 전락하는 약점이 있었다. 차라리 [[쌍안경]]을 쓰거나 그냥 맨눈으로 관측하는 [[견시]]가 대강 감으로 부정확하게 때려맞추는 게 더 정확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레이더 연동사격이 가능하짐에 따라 미국 해군은 특히 악천후나 야간전에서 상대인 일본해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더가 아직 초창기라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던 시절인 [[과달카날 해전]]에서 [[워싱턴(전함)|워싱턴]]이 [[기리시마(순양전함)|기리시마]]를 상대로 9km 거리에서 첫번째 일제사에 협차를 내고 신나게 두들겨서 격침시킨 것은 레이더 연동사격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해전에서 기리시마는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상대로 5km 거리에서 우수한 견시의 도움을 받으며 탐조등과 조명탄까지 사용하면서 117발의 포탄을 날렸지만 명중탄은 2발 뿐이었다. 또한 헤일스톤 작전에 참여한 아이오와급 전함 아이오와가 노와키를 상대로 '''35000야드(약 32km)'''에서 협차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레이더가 없었다면 탄착 확인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노와키 쪽 기록에는 협차로 판명될 탄착흔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견시에 의존하는 구축함이 주변에 떨어지는 포탄을 전부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아이오와와 뉴저지는 레이더로 탄착군을 관측했으므로 미군 자료의 신뢰성이 더 높은 것으로 취급한다. 이는 레이더를 사용하면서 이전까지는 포격이 불가능했거나, 할 수는 있어도 명중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포격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광학 기기에 의존하는 관측보다 레이더 관측이 훨씬 더 유리해진다. 야마토에 장착되었던 15.5미터 광학 측거의는 30km에서 오차가 300m였으나, 비슷한 거리에서 미군의 Mark 8 사격통제 레이더는 오차가 48야드, 약 45m 수준에 불과하다. 25km 밖 초수평선 교전 시에는 야마토가 살포계를 개선했어도 심각한 오차로 제대로 사격을 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도 이 정도 거리면 표적은 레이더로 확인하지만, 일본의 레이더가 '''심각하게 성능이 저열하기 때문에''' 탄착확인이 불가능하여 미국이 구사하는 완전한 레이더 관측 사격은 꿈도 못꾸고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았을 것이다. 실제로 [[레이테 만 해전]]의 사마르 해전에서 [[호위항공모함]]과 [[호위구축함]]이 주력인 태피3을 상대로 야마토가 사격을 개시했으나 곧 미군이 뿌린 연막으로 시야가 가려져서 광학장치가 작동할 수 없게 되자 억지로 레이더 관제사격을 실시했으나 탄착확인도 부정확할 수준으로 실패하였다. 물론 일본의 일부 깨어있는 사람들은 레이더 개발 및 배치를 전간기 시절부터 주장했으나 견시병을 훈련하면 되지 않나?와 레이더 전파를 역탐지해서 우리가 공격받으면 어찌 할텐가? 라는 상부의 명령으로 개발이 중지되거나 지연된 상태로 전쟁에 임한 것이 큰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서 [[야기-우다 안테나]]같은 훌륭한 레이더용 안테나를 개발해놓고도 적용이 심각하게 느렸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안테나는 우다 신타로가 주도해서 제작했으며 우다 신타로의 교수인 야기 히데츠구가 영국 유학 중에 발표 및 특허 출원까지 한 상태라서 정작 '''미군과 영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잘만 썼다.''' 일본이 이걸 알아챈 것은 [[싱가포르 전투]] 승리 이후에 영국군의 레이더 관련 서류를 찾아보다가 해당 서류에서 Yagi라는 단어를 발견한 때였다. Yagi라는 단어가 대체 무슨 뜻인지 고민하던 일본군은 결국 영국군 포로에게 질문했고, 그 포로는 "야기는 이 안테나를 만든 일본인의 이름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라고 되물었을 때에나 문제를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에 광석 검파기를 이용한 신형 슈퍼헤테로다인 수신장치가 제작되기 전까지 전파 수신문제도 해결이 안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개발에 관련된 관계자가 광석 검파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제작도 가능했으나 충분히 실험하지 않은 채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도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광석 검파기는 열에 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회로가 간단한 오토다인 방식을 고집한 것이 수신기의 성능이 열악했던 주된 이유로 밝혀졌다. 그나마 수신장치는 해결이라도 났지 기본적인 회로를 구성하는 [[진공관]]은 '''1936년에 일본 내 모든 전파기기의 연구 및 개발이 금지된 조치'''의 타격을 입어서 생산도 1920년에 군수사업부를 설립해서 무선통신장비를 제조한 일본무선에서 [[독점]]으로 생산하고 있었는데 품질향상도 별로 없었고 생산수량도 그렇게 많지 않은 실정인데다가 성능도 딱 민수용인 가정용 라디오에나 사용하는 수준이라 기본적인 성능이 저질이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의 전장 특성상 기본적인 전장의 험악함 + 진공관에 매우 안좋은 [[습기]]가 넘침의 합작으로 인해 무전기를 장착한지 얼마도 안지나서 진공관이 수명을 다하거나 깨지거나 공기가 새들어가서 진공상태가 풀리거나 녹슬거나 하는 각종 이상증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공관의 기본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므로 무전을 수신하는 기능, 무전 신호를 깨끗하게 잡아내는 필터링 기능, 잡아낸 무전 신호를 증폭하는 기능이 모조리 제대로 동작하지 않게 된다. 회로가 동작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런 안좋은 상태가 합쳐진 결과는 일본의 2호 2형 전탐에서 드러난다. 해당 전탐은 이론상 15km 정도 거리의 부포 물기둥을 탐지가 가능하기는 하나 방위각 오차가 상당하다. 대략 3도 정도인데 독일의 1936년작 초기형 seetakt 레이더와 거의 비슷한 성능이며 중거리의 range finding만 가능할 정도의 성능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화기관제 레이더처럼 탄착 확인이 가능하려면 2 mils 정도의 정확도가 필요하다. '''각도 1도가 17.453 mils''' 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정확도의 차이가 한번에 느껴질 것이다. 전후에 [[포경선]]에 레이더가 필요했는데 레이더 부족으로 전쟁때 사용하던 2호 2형 전탐을 사용한 일본 국적 포경선에 감시목적으로 승선한 영국군 장교가 이 따위 레이더를 쓰니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했다고 욕을 할 지경이니 말 다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