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산강 (문단 편집) == 연혁 == 형산이라는 이름은 경주시와 포항시의 접경에서 제산(弟山)과 마주하고 있는 형산(兄山)에서 유래됐다. [[7번 국도]] 경주와 포항 경계 지점의 유강터널이 지나는 산이 제산이며[* 그래서 옛 [[7번 국도]]의 경주-포항 경계 도로도 [[제산로]]인 것.] 강 건너편에 있는 산이 형산이다. 형산과 제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후삼국시대]]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전설이 얽혀있다.[[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5704|#]] 당시에는 형산과 제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는데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경순왕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용으로 변한 것이 마의태자라고도 한다.] 이 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경주)|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하여 형산 쪽에는 경순왕과 마의태자를 모시는 절과 사당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형산 정상에 있는 왕룡사이다. 이 곳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왕장군용왕전에 경순왕과 태자를 상징하는 목각이 있다. 이와 같은 전설은 당시 이 쪽 근방에서 있었던 신라부흥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포항시 연일읍~경주시 강동면 일대에 부조장터라는 큰 규모의 시장이 구한말 무렵까지 존재했고 현재까지도 각종 지명과 도로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포항시에서도 부조장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2008년부터 연일읍 생지리 강변 둔치에서 매년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포항시 하류에서 강을 따라 조성된 대략 10미터 높이의 강둑은 1930년대에 축조 되었다고 알려져있고 1950년대 초반까지는 경주 시내까지는 거뜬히 중소형 선박과 배가 하류에서부터 올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까지 포항[* 1950~1960년대까지 포항에 염전이 있었다.]에서 소금장수가 걸어서 경주까지 와서 소금을 팔고, 다 팔면 형산강의 배를 타고 하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1950년 9월에는 6.25 전쟁이 진행되던중 북한군의 남하로 이곳을 방어선 삼아 일주일간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하천정비를 실시하면서 퇴적물들로 형성된 불규칙한 지형이 반듯해지고 강을 따라 콘크리트 제방이 건설되었다. 2010년대 이후엔 강둑 위로는 자전거 도로가. 강둑 아래로는 주차장과 공원 및 정원이 대거 조성되면서 황량했던 강변에 캠핑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