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공왕 (문단 편집) == 기타 == *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더불어 관리 직업의 하나인 '도류'와 어울렸다는 기록[* 당시로서는 남자만 궁중의 관원이 됐고, 도류가 여자라면 기록될 이유도 없다.], 기록에 묘사된 여성스러운 행동들로 미루어 보아 혜공왕은 [[성소수자]]였던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생물학]]적 성별이 [[젠더]]와 불일치하는 [[트랜스젠더]]였을 가능성도 있고, 그냥 단순히 행동이 여성스러운 [[동성애자]]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저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어차피 당시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데다 성소수자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8세기 사람들이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구분해서 기록했을 리도 만무하다. 현대에 들어와서조차 두 개념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고대 시대 사람들은 오죽할까? [[학자]]에 따라서는 혜공왕이 정치적으로 무능력하다 보니 권위가 제대로 서지 못해서 [[정적]]들이 여성스러운 성격을 빌미삼아 혜공왕을 깎아내렸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남성과의 성관계 언급이나 [[남총]]에 대한 기록이 없고, 자식을 두었음이 죽임을 당할 당시 기록에서 언급된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관점의 성소수자로 보기에는 의문거리가 많다. * 768년(혜공왕 4년)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 귀숭경 일행의 일원이었던 고음은 당나라로 돌아가 당대 신라에 대해 파악한 정보들을 정리해 《[[신라국기]]》를 저술했다. 전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당서]]》나 《[[삼국사기]]》에서 이 책에 기록된 신라 사회상을 인용했다. *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설화]]>는 혜공왕이 [[모티브]]라는 이설이 있다. 아이는 혜공왕, 어머니는 섭정을 하던 만월부인, 아이를 쇳물에 녹여 성덕대왕신종을 완성시킨 이는 당시 실권자였던 만월부인의 오빠인 김옹(혹은 외사촌이자 왕위를 찬탈한 선덕왕)이라는 것이다. * 최후에 쿠데타로 시해당해서 그런지 무덤의 위치가 알려져있지 않은 신라왕들 중 하나이다. 일단 '전 [[민애왕릉]]'[* 민애왕의 왕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을 혜공왕의 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발굴조사에서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 헌덕왕 7년(815)]이란 글자가 새겨진 뼈단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