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량 (문단 편집) == 생애 == 신라의 장군 [[거칠부]]가 고구려를 염탐하다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후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거칠부가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에 참가하였고, 옛 은혜를 갚기 위해 진흥왕에게 혜량을 천거해 이 일로 신라로 넘어왔다. 그는 신라 불교 교단을 책임지는 국통이 되어 밑으로 주통, 군통 등의 불교 교단을 정비 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팔관회는 잠깐잠깐 폐지되기도 했지만 거의 수백년이 지나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계속 열렸다.] 이때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고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신라는 혜량을 중용, 진흥왕 시대부터 불교색이 굉장히 강해지는데[* 신라 왕가와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하려고 할 정도였다.] 시기상 승통 혜량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기존에 들어와있었던 불교는 백제를 매개로 한 중국 남조 불교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때 고구려승 혜량을 통해 북조 불교까지 신라에 유입되어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초기부터 남북조 두 계통의 불교가 융합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신라 불교가 역사가 짧으면서도 급속히 발전한 만한 요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한편 혜량이 거칠부를 통해 신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을 언급하는 단락이 있는데[* 나라가 혼란해 멸망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대놓고 언급한다.], 이로 인해 [[일본서기]]에 나온 [[안원왕]] 말엽의 왕위 계승 분쟁과 결부되어 이 시기에 고구려가 귀족 간의 대립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다는 학계의 추측이 유력시되고 있다. [[분류:고구려의 승려]] [[분류:신라의 승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