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화문 (문단 편집) == 역사 == 1396년(태조 5년)에 창건했고 조선시대 내내 한성에서 [[강원도]],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태종 때 풍수적 문제로 북문 숙정문을 폐쇄한 후로는 사실상 북대문 역할을 했다. 원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 홍화문|창경궁 정문 이름도 '홍화문']]이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쳤다. 언제 바꿨는지는 모르나, 창경궁 홍화문 창건 시기가 1484년(성종 15년)이기 때문에 아마 그 이후일 것이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불탔고, 1684년(숙종 10년)에 재건했다. 1739년(영조 15년)에는 문짝에 불이 붙어 문을 못 닫자 한동안 어영청 병사들이 지키기도 했으며 5년 뒤에는 문루를 개수하고 현판을 새로 걸었다. 그렇게 몇백 년간 잘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관리 보수가 어렵다며 일제가 문루를 헐어버렸다. 석축과 홍예는 남겨두었는데 1935년에 남은 돌들마저 무너져 인근 초가집을 덮치면서 일가족 5명이 매몰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507230020010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5-07-23&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3년 뒤인 1938년에 일제는 [[동소문로]]를 뚫고 전찻길을 만들면서 남은 석축과 홍예마저 철거하여 구 혜화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혜화문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복원공사를 통해 복원한 것이다. 다만, 원래 혜화문이 있었던 곳과는 약간(10m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사이에 해당 지역의 지형이 딴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939년 일제가 혜화동을 종점으로 하던 [[서울전차|경성전차]]를 돈암동으로 연장하면서[* 1937년 돈암지구 도시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전차선 연장. 쉽게 이야기하면 [[신도시]] 개발하면서 지하철 노선을 연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혜화문을 철거함과 동시에 언덕이었던 해당 도로를 [[전차]] 통행을 위해 토목공사로 평탄화 하였다. 따라서 혜화문이 있던 원래 터는 혜화문이 있을 때보다 7m정도 낮아진 것이다. [[동소문로]]를 지나갈 때 보이는 좌우의 서울성곽 높이가 도로보다 꽤 높은 곳에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혜화문을 진짜 '''원래 위치'''에 복원하려면 도로 위 공중에 띄워야만 한다. 다시 흙을 쌓아 도로레벨을 혜화문 있던 당시 높이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종로구-성북구 경계인 해당지역은 대한민국 자동차 등록댓수가 지금의 1/100도 안 되었던 1970년대에도 전국에서 교통량이 많기로 알려진 곳 Top 10 안에 들었던 곳이다. 물론 지금도 장난아니고.] 결국 지금처럼 원래 혜화문 위치에서 '''수평'''으로 조금 옮긴 곳에 만들었다. 만일 원래 위치를 강조해서 동소문로에 만들어도 높이가 '''수직'''으로 맞지 않게 된다. 즉 원래 위치가 아닌 것은 마찬가지.[* 물론 원래 위치에 구름다리를 만들어(마치 미아리고개 정상부 버스정류장 위 아치형 도로처럼) 그곳에 복원하고 아래에는 차량 통행용 터널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모양이 좀 우스꽝스러워진다.] 즉 현지의 지형 구조상 어떤 방법으로 복원하더라도 오리지널 위치에서 복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 [[파일:舊_혜화문_현판.png|width=50%]] || || {{{#fff '''1994년 다시 만들어질 당시의 혜화문 현판'''[* [[이원종(1942)|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의 글씨이다.]}}} || || [[파일:新_혜화문_현판.jpg|width=50%]] || || {{{#fff '''조선시대 현판을 본따 복원한 2019년 현판'''}}} || 복원한 문의 세부적 모습도 그닥 꼼꼼하게 고증한 것 같지는 않다. 현판의 글씨 방향도 현대 국어에서 쓰는 방법인 좌 → 우 방향이고, 글씨 서체도 위엄없이 날려쓴 글씨체이다. 그래서 원본 현판이 있음에도 원본을 본따 다시 제작하지 않은 건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받아 왔었다. 그러다가 2019년 11월 22일, 원래의 혜화문 현판을 본따 제작한 현판으로 복원을 해 조선시대 당시의 정취가 조금은 되살아 났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1604783|#]] 이 문의 별칭을 따 [[동소문로]]라는 도로명이 생겨났는데, 혜화동로터리 ~ [[한성대입구역]] 구간이 [[창경궁로]]로 편입되면서 '''[[동소문로]]에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동소문(혜화문)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겨우 200m 정도라는게 위안. 또한 [[동소문동]]도 이 문의 이름을 따왔다.[* 원래는 [[돈암동]]의 일부였으나, 1963년에 분리되었다.] [각주] [[분류:서울 한양도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