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호국전쟁 (문단 편집) === 군무원 성립 === 4월 말에 일본을 떠났던 쑨원이 마침내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다. [[다이지타오]], [[랴오중카이]] 등이 쑨원을 수행했다. 5월 4일 산동성에서 쑨원의 지시를 받고 [[쥐정]]이 지휘하는 1천명의 중화혁명군 동북군이 유현, 주촌 등지에서 거병했다. 5월 5일 중화혁명군은 주촌을 점령했다. 한편 독립을 선포한 각 성은 통일된 군사행동과 정식 교전단체로의 인정을 위해 광저우에서 군무원을 설치하려 했으나 용제광이 장소 제공을 거절하여 조경에 모여 군무원을 성립하였다. 원래 탕지야오는 위안스카이의 퇴위를 강요하고 부총통 리위안훙에게 대총통 자리를 잇게 하고 내각제를 실시해 량치차오를 총리로 삼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량치차오는 강경히 군정부를 조직을 주장했다. 5월 8일 군무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어 탕지야오를 국무총리 격인 무군장으로, [[천춘쉬안]]을 부무군장, 량치차오를 정무위원회 위원장에 추대했다. 천춘쉬안은 <출사포고>를 발표, 위안스카이의 퇴위만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입법원 격인 각성 대표회를 두려 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실시되진 못했다. 군무원은 각국 공사와 영사들에게 상민교섭을 지방 군민장관과 외국 영사 사이에서 처리하고 중앙 외교사무는 군무원에서 처리하겠다고 통보하며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했다. 5월 9일에는 쑨원이 토원선언을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오늘 이미 그의 길이 막혔는데 아직도 사태를 관망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죽어도 변치 않을 그의 권력욕 때문이고, 둘째는 지금까지 혁명을 창도해온 사람들 중에 파벌이 존재하여 파당 사이에 분쟁이 그치지 아니하고 상호 간에 시기와 다툼이 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여 적을 치지 못했음에 원인이 있다. 주의가 일치된 사람들, 동일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애국 정신으로 다시금 상호 간에 제휴한다면 구적이 뜻을 펼치려는 요행은 감히 바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오늘은 마땅히 일치하여 나라를 구할 때일 뿐, 결코 군웅이 천하를 다툴 때가 아니다. 오직 무력으로써 흉적을 제거하여 약법에 입각하여 사태의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독립선언은 계속되어 5월 9일 섬북진수사 진수번이 삼원현에서 독립을 선포하여 섬서장군 육건장을 축출했고 5월 10일 중화혁명군이 고밀을 함락시켰다. 5월 12일에는 중국은행과 교통은행이 태환을 정지시켰고 위안스카이 정권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5월 17일 난징에서 [[장쉰]]과 [[니쓰충]]이 중앙과 독립을 선포하지 않은 17개 성의 대표 33명을 난징에 소집하여 난징회의를 열었다. 펑궈장은 위안스카이를 잠시 대총통으로 인정하되 국회에서 곧 새 대총통을 뽑자는 타협안을 제안했으나 산동성에서 먼저 위안스카이의 하야를 요구했고 다른 성들도 잇달아 하야를 요구했다. 펑궈장은 놀라 회의를 종결시켰고 위안스카이는 호위대 3개 영을 보내 강제로 회의를 다시 열어 각 성의 대표들을 위협했으나 즉시 하야 요구 결의안만이 부결되었을 뿐 위안스카이에게 유리한 결과는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최후의 발악으로 5월 18일 상하이에서 [[천치메이]]를 암살했으나 5월 22일에는 사천장군 진환이 5월 3일과 12일 두차례 위안스카이에게 퇴위를 권고했으나 듣지 않자 사천성의 독립과 위안스카이와의 단절을 선포했다.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며 즉위를 촉구하던 진환의 배반에 위안스카이는 너무도 격노해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한참만에 깨어난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했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5월 27일 방광결석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위안스카이는 군주제 시말안을 발표하여 반대파에게 정치적 책임을 씌울 궁리를 하는 한편 군비 확충을 지시했다. 허나 군주제 시말안이 발표된 5월 29일 호남장군 탕향명도 호남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4월 29일과 5월 19일 산동장군 [[진윈펑]]도 위안스카이의 퇴위를 요구했으나 이로 인해 축출되고 장회지로 대체되었다. 군무원 성립 과정에서 배제된 중화혁명당은 불만이 없지는 않았으나 위안스카이 타도라는 대국적인 목표를 위해 군무원에 협조하기로 결정하고 5월 23일 각 지방의 혁명당원들에게 군무원과 협조하고 운남, 광서, 절강, 강서에서 사용하는 오색기의 사용을 허락했다. 5월 26일 중화혁명군이 유현을 함락시켰으며 5월 25일과 6월 4일 제남을 공격했으나 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제남을 제외한 산동 전역이 중화혁명당에게 장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