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국전쟁 (문단 편집) ===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홍헌제제]] ===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1913년 7월 [[계축전쟁|제2차 혁명]]을 진압한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 10일]], [[신해혁명]] 2주년을 맞이하여 [[자금성]] 태화전에서 마치 황제처럼 화려하게 정식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연일 독재를 강화하며 12월 29일 5년 중임제의 [[대총통선거법]]을 [[수정대총통선거법|개정]]하여 10년 무한 연임제로 바꾸어 사실상의 종신 집권과 세습까지 정당화했으며[* 대총통에게 세 명의 후임자를 천거할 권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위안커딩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술수라고 수근거렸다.] [[1914년]] [[1월 10일]]에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1월 28일]] 각 성의 성의회도 해산시켰다. 1914년 3월 20일 위안스카이는 약법 수정대강 7조를 제출, 대총통에게 황제와 같은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여 '초급총통제'를 실시했다. 5월 1일 초법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신약법이 발표되었고 중국의 민주정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런 황제적인 권력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황제 즉위를 꿈꾸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를 부추겼고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와 청나라의 복고를 주장하는 복벽파를 모두 탄압하며 군주제 복고의 여론을 조성, 급기야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참정원 국민대표 1993명은 만장일치로 위안스카이를 황제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짐짓 사양했으나 12월 12일 아침 다시 한번 추대를 받자 이를 받아들여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홍헌으로 정해 1916년 홍헌 원년으로 하였다. 이를 [[홍헌제제]]라 하고 [[중화민국]]은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