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호국전쟁 (문단 편집) === 호국군의 조직 === 12월 23일 [[탕지야오]], [[차이어]], [[리례쥔]] 등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운남장군 탕지야오와 순안사 임가징의 명의로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제를 지키고 군주제를 영원히 폐지할 것, 제제를 부추긴 양탁,[* 양도라고 표기한 곳도 확인된다.] 엄복, 호영, 주계검, [[돤즈구이]], 주자제, [[량스이]], 장진방, 뇌진춘, 원내관 등 13명의 측근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리고 24시간 이내에 만족할만한 대답이 없으면 무력으로 최종적 해결에 나서겠다는 통보를 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간 각 지방의 장군들이 서로 즉위를 부추겼기 때문에 탕지야오 등이 왜 갑자기 제제 취소를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정사당에게 상황을 알아볼 것을 지시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차이어 등은 호국군을 조직하여 탕지야오를 도독 겸 제3군 총사령관으로 삼고 차이어를 호국군 제1군 총사령관, 리례쥔을 호국군 제2군 총사령관으로 삼아 1915년 12월 25일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들은 위안스카이가 민국을 배반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하는 죄를 성토하고 국민이 합심협력하여 공화국을 옹호하며, 제제를 영구히 저지한다,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하고, 각 성 민력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각 성의 봉기를 호소했다. 이에 [[계축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청첸]] 등이 귀국하여 호남성에서 봉기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호응이 뒤따랐다. 차이어의 군대는 3천에 불과한 반면, 위안스카이의 군대는 압도적인 세력이었으므로 [[제1차 세계 대전]]에 바빴던 열강들은 대부분 운남에서의 반란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위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상태라서 반란을 신속히 진압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은 위안스카이의 차관을 거절했고 위안스카이는 담배와 술의 전매수입을 담보로 2천만원의 국내공채를 발행해 전쟁비용을 마련했다. 차이어의 1군은 사천으로, 리례쥔의 2군은 호북, 호남으로 진출했으며 탕지야오는 후방에서 지원을 맡았다. 이들의 반란 때문에 각국 공사들이 국내 통일이 달성되지 않았다고 난색을 표하자 위안스카이는 홍헌원년 원월 원일인 1916년 1월 1일 즉위식을 거행한다는 계획을 2월로 연기하고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하고 국호를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외교 공문에는 홍헌 원년을 쓰지 못해 민국과 제국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1916년 1월 5일 위안스카이는 운남원정군을 조직하여 [[차오쿤]]을 파견했다. 차오쿤은 부대를 두개로 나눠 사천과 호남 서부 지역으로 진군했다. 위안스카이는 중난하이에 정벌을 총괄하는 임시 사무실을 설치하는 한편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이쇼 덴노]]의 즉위를 경하하기 위해 대훈장을 수여하겠다는 구실로 농상총장 주자제를 일본에 특사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길림, 봉천의 사법권, 지포철도의 북반부 관할권, 톈진, 산동 연해의 해안선을 일본에 양도하고 일본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들을 초빙하며 중국의 병기창을 중일 공동으로 경영하는 대가로 일본의 제제 지지와 내란 진압을 요청했다. 이 밀약은 주중 프랑스 공사 콩티가 입수하여 미국 언론을 통해 폭로했고 위안스카이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1월 14일까지 주자제에게 특별연회를 베풀며 그를 친왕으로 대우하겠다고 약속하던 일본은 1월 15일, 1월 24일로 예정되어 있던 주자제의 일본 방문을 다이쇼 덴노가 피한여행을 떠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더군다나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묵인하던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외상 [[가토 다카아키]]가 사퇴하고 이시이 기쿠지로로 교체되면서 일본의 태도도 급변했다. 이시이 외상은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대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위안스카이의 제제를 제어하기 위한 공동행동을 주문했다. 위안스카이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협상국]]들의 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일본은 중국이 승전국이 될 경우, 산동반도의 [[키아우초우|독일 조차지]]를 회복하여 일본의 이익을 해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이 역시 반대했다. 1월 19일 일본은 즉위를 미룰 것을 요구하며 듣지 않는다면 무력간섭을 하겠다고 위협했고 위안스카이는 2월 초순으로 예정되어 있던 즉위식을 더욱 연기한다고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