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꾸이리 (문단 편집) ==== 개혁 정책 ==== 대월은 이전 [[유종(쩐)|진유종]]이 국사를 신경쓰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귀족, 백성, 노예들 간 격차도 심해져 나라가 황폐해져갔다. 호계리는 진철제에게 중용된 이후 이러한 폐단들을 없애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은 호조가 1407년 멸망할 때까지 집행되었다. * 화폐 개혁: 1396년 조정에 대한 경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통보회전(通寶會전錢)'''이란 지폐를 급진적으로 발행했다. 이 지폐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지폐로 민간에서 그동안 쓰였던 동전과 교환하여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함을 우선했다. 10문, 30문, 1백전, 1 맥전(陌錢), 2맥전, 3맥전, 5맥전으로 동일히 나누어 발행했다. * 상업 개혁: 위의 강제적인 화폐 통합으로 경제의 주도권을 잡은 호계리는 1403년 [[진나라|영진]]의 예처럼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해 값어치를 최대한 동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국에 '''시감(市監)'''을 두어 상인들의 일탈을 막고 외국 상선의 상업세를 동일한 값으로 통일했다. * 도로 개척: 1375년부터 전국 각지에 [[운하]]와 직접 국가가 관리에 들어가는 도로를 건설하고 각각의 길마다 [[역참]]을 설치했다. * 토지의 국유화와 토지 수탈의 제한: 토지는 이전 진조 시기에 문제점이 많았다. 황제가 토지를 종실과 측근들에게 분배하여 그들은 가노를 불려 기득권을 차지하고 황무지 개척과 잦은 수탈로 그 세를 불려 나가는 등 진조의 토지 정책엔 폐단이 많았다. 호계리는 집권하자마자 중국의 [[균전제]]와 비슷하게 그들의 토지를 몰수해 어느 누구의 토지도 10이랑을 넘으면 안되며 위반자는 여분의 밭을 몰수해 공적으로 쓰게 했다. 토지는 대왕(大王), 장공주(長公主)로만 봉해진 자들만 제한없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이듬해엔 각 노(路), 부(府), 주(州), [[현관]]들에게 측량 기구를 설치하도록 했다. 토지를 소유한 이들은 모두 해당 기관에 가서 땅의 면적을 등록하고 자신의 이름을 나무토막에 적어 논에 꽂아 식별을 명확히 해야 했다. 주인이 없는 토지는 국유화했다. * 노비 구제: 이전 진조의 법은 종실과 [[상국]]이 가노를 천 여명이나 가질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그렇게 그들의 노예들은 심한 차별과 힘든 중노동에 종사했다. 노비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주인을 고소할 수 없도록 법이 정해져있었고 서민과 결혼도 금지되었다. 진조 말기 제후왕 전용 노예들은 얼굴에 궁중객(宮中客), 황제의 노예는 좌상노(座上奴)라는 글자를 새기게 했다. 이러한 지나친 차별 정책은 관노의 불만을 쌓게 했고 관노들 사이에 자주 반란이 일어나 진조를 위협했다. 그래서 호계리는 집권 후 소수의 고위 관리들이 소수의 노비를 매수하는 것 외엔 다른 이가 노비를 갖지 못하도록 법을 정했다. * 조세: 진조 시기엔 인구 1명당 땅을 얼마나 갖고 있든 상관없이 동일한 세금을 내야 했는데 호계리는 1402년 조세제도를 개혁해 자신이 갖고 있는 땅에 따라 세금을 달리 내도록 했다. * 행정 기구의 재편: 호계리는 1397년 일부 변방의 길을 진(鎮)[* [[읍]](邑)과 비슷하다. 이 진은 [[응우옌 왕조]] 시기엔 마치 [[번국]] 비슷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번국과 비슷하긴 하지만 완전히 똑같진 않다.]으로 바꾸었다. || 청화진(清化鎮) || 청도진(都) || || 국위진(國威鎮) || 광위진(廣威鎮) || || 타강로(沱江路) || 천흥진(天興鎮) || || 연주로(演州路) || 망강진(望江鎮) || 그리고 이런 진들에 무관들을 파견해 이 진을 통치하게 했다. 이러한 정책은 대월 변경(국경 근처)에 대한 통치를 강화한 것이다. 동시에 개혁에 반대하는 지방관을 다른 지방관으로 교체하고 각지엔 반드시 [[전지]]를 등록하도록 하고 그 지방에서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을 수사하게 하여 그 판결을 조정으로 보내게 했다. 그리고 [[참파]]에게 뺏어낸 영토엔 사람들을 이주시켜 황무지를 개간하게 했는데, 이주하는 자와 그 가족까지 같이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을 떠나 개간하지 않으려 했고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 군제 개혁: 진조 말기 진씨 황제는 주색에 빠지고 군사 시설과 장비(무비, 武備)를 폐했다. 1375년부터 호계리는 군사 개혁을 시도했고 숙위군을 만들어 무술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구성했다. 1401년엔 2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관청에 그 신상을 등록하게 하고 [[장인]]을 등용해 [[명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전선]]을 만들고 [[화약총]]과 탄약 제조, 북방 요새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노역은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해 백성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 교육과 과거: 나날히 번창해가는 상업에 기여하기 위해 1396년 과거시험에 [[산술]] 과목을 추가했다. 그리고 과거 시험에서 개념 적용을 위해 암기하는 내용을 토대로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식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 관복 제정: 1396년 중국의 관제를 모방해 관원의 등급을 세분화하고 구품의 색을 명확히 구분시켜 관직이 없는 이는 흰색의 관복을 입게 했다.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정책이 으레 그렇듯, 특히 토지, 노예제한, 과거개편은 기존 기득권의 입지를 위협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호 왕조에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호계리는 그들의 반발엔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그들을 강제로 옥에 잡아넣었다. 자연스레 민심이 악화되어 하층민들은 개혁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나친 징집과 군사시설 건설에 중용되는 강제 노역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더해져 전국 단위로 호씨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 호씨 일가는 위기에 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