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른 (문단 편집) == 여성 연주자 ==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서구 오케스트라 단원은 대부분 남자였다. 남자들이 대거 징집된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단원이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유럽(특히 독일)과 달리 장인-숙련공의 개념이 없었던 미국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두드러졌다. 헬렌 코터스(Helen Kotas)는 여성 오케스트라 호른 주자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시카고 일대의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수석을 역임한 코터스는 1941년 25세의 나이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호른 수석으로 발탁되어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최초로 여성 호른 수석이 되었다. 그러나 1947년 그녀의 전임자이자 미국 호른계의 대부격인 필립 파커스(Philip Farkas)가 시카고 심포니로 복귀하게 되자 그녀는 수석에서 평단원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그녀는 그 시즌이 끝나자 시카고 심포니를 떠났고 이후 시카고 리릭 오페라 수석 등을 역임했다. 코터스 이후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다시 여성 호른 수석이 나타낼까지는 의외로 상당히 오랜시간이 걸렸는데 그 주인공은 2006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호른 수석이 된 Jennifer Montone이다. 앞서 언급한 시카고 심포니 호른 파트는 코터스 이후에도 몇 명의 여성 단원들이 입단하여 평단원으로 활동했는데, 20세기 당시 미국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호른 주자들이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오케스트라였다. 1978년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게일 윌리엄스(Gail Williams)는 데일 클레빈저가 좀 더 일찍 은퇴했다면 지금 대학교수가 아니라 시카고 심포니에서 호른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오래지 않아 시카고 심포니를 떠났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강의 금관파트를 가졌다는 시카고 심포니가 미국에서 여성을 호른 주자들을 유독 적극적으로 기용했다는 사실은 다소 이채롭다. 미국 출신의 줄리아 스터드베이커(Julia Studebaker)[* 미국 일리노이 출신이다. 인근 시카고 심포니 단원들로부터 호른 레슨을 받았다.]는 유럽에서 여성 호른 연주자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녀는 1973년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나이에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수석으로 발탁되어 당시 남성 단원 일색이었던 독일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독일 메이저 오케스트라에서 여성이 호른 수석이 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듬해인 1974년 그녀는 세계 정상급 명문 오케스트라인 네덜란드의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발탁되었다.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는 유럽 메이저 오케스트라 중에서 여성 호른 단원들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오케스트라였다. 줄리아 스터드베이커 이외에도 몇 명의 여성 호른 단원들이 1970년대부터 콘서트헤보에서 활동했다. 스터드베이커는 2002년까지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그녀의 연주 모습은 필립스와 유니텔 등이 녹화한 여러 영상물 자료에 남아있다.[* 평소에는 해맑은 미소를 짓는 얼굴이지만, 수석 자리에서는 중압감에 짓눌린 듯 항상 미간을 찌푸린 표정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녀가 유럽 음악계에 미친 파장은 컸으며 그녀의 성공적인 커리어 이후 유럽 오케스트라에서도 많은 여성 호른 단원들이 활약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는 호른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하는 마리 루이제 노이네커(Marie Luise Neunecker)가 있다.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평단원으로 시작해 수석으로 올라왔고,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수석을 거쳐 이후 솔로 활동과 후학 양성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구급 본좌 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베를린 필]]에도 유일한 여성 호르니스트 사라 윌리스가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필의 저음 호른주자 퍼거스 맥윌리엄의 제자였던 사라 윌리스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을 거쳐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호른단원이 되었다. 사실 윌리스 이전에 베를린 필에서 활동한 여성 호르니스트가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누리 과르나셸리(Nury Guarnaschelli)는 베를린 필 카라얀 아카데미에서 베를린 필 호른수석 게르트 자이페르트(Gerd Seigert)에게 사사하면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베를린 필에서 객원단원 신분으로 연주했다. 그녀가 처음 베를린 필에서 연주하기 시작한 1984년 베를린 필은 최초의 여성 정단원 선발문제와 관련해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 터지는 등 홍역을 거치던 시기였다. 마이어 사건 이전에도 1974년 여성 플루트 주자 기용과 관련해 갈등이 발생하는 등 베를린 필에서 특히 목관악기 단원들은 여성 연주자 기용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과르나셸리는 스승이자 호른 수석인 자이페르트의 신임 하에서 베를린 필에서 고음[* 1984년 베를린 필 세컨드가 공석이 되었을 때 그 자리를 채우기도 했고, 이후에는 게르트 자이페르트의 어시스턴트 등 고음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저음을 가리지 않고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카라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1988년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이 되면서 베를린 필 객원단원을 그만두었다. 이후 빈 방송교향악단 수석 및 솔로 활동을 겸하다가 2018년 베를린 필의 고음 호른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서 약 30년만에 다시 베를린 필 객원단원으로 초빙되고 있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여성적인 악기라는 이미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악기를 전공하는 여학생들도 많은 편인데, [[이화여자대학교]]나 [[숙명여자대학교]] 같은 [[여자대학]] 뿐 아니라 [[남녀공학]]인 다른 대학들에서도 많은 여성 호른 전공자들이 배출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