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법전쟁 (문단 편집) === [[북양군벌]]의 분열 === 군정부가 내분에 휩싸인 사이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부대가 3월 17일 악양을 탈환했고 4월 23일까지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하면서 호남 전역을 다시 북양군의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군정부의 멸망이 눈앞에 이른 듯 하였지만 북양정부 역시 내분에 휩싸였다. 자신에게 호남독군 자리가 돌아오긴 커녕 공적도 없던 [[장징야오]]가 대신 차지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우페이푸가 별안간 정전한 것이다. 1918년 4월 24일의 한커우 회의에서 북양군벌들은 남방에 대한 무력통일 노선에 표면상 합의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합의였다. 돤치루이는 정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묵살했다. 장징야오는 사직을 청하고 차오쿤은 직군의 회군을 요구하면서 직예군이 맡고 있던 호남전선 전체가 사실상 정전 상태에 놓였다. 내분에 직면한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직계 우페이푸의 무력을 견제하려 했다. 이를 위해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양호순열사에 임명하고 쉬수정을 직예독군으로 삼았다. 하지만 호북과 호남은 북양군벌 통치 하에 있지 않아서 이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차오쿤은 돤치루이의 편에 붙기는 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이예 쉬수정은 사천성에 투입하려던 봉군을 호남에 대힌 투입하기로 하고 5월 9일 손열신의 봉군 27사단, 급금순의 28사단, [[우쥔성]]의 29사단을 장사에 배치했다. 이 때문에 직예군은 오히려 더욱 반발하게 되었다. 장쭤린 역시 쉬수정이 임의로 자신의 부대를 재배치한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껴 각 사단장들을 소환하고 변방에 긴장이 고조된단느 구실로 호남의 봉천군을 철수시켜버렸다. 계속 칭병하며 직예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표하던 차오쿤은 5월 29일 1로군 사령부 인원을 거느려 한커우를 떠나버렸다. 결국 한커우 회의는 주요 참석인물들이 칭병하여 빠지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돤치루이는 차오쿤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북양군벌을 단결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 차오쿤에게 사천, 광동, 호남, 강서 4개 성의 군정을 총괄하는 사성순열사 자리를 주었는데 이 중에서 강서성을 제외하곤 전부 다 북양군벌 통제 바깥이었으로 역시나 의미없는 자리였다. 톈진으로 돌아가버린 차오쿤은 톈진에서 2차 독군단 회의를 소집했고 돤치루이는 이에 대한 맞불로 베이징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으나 독군들은 톈진에 머물며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쉬수정이 6월 13일, 돤치루이의 동의도 없이 주화파이며 펑위샹의 삼촌인 육건장을 톈진의 봉천군 사령부로 초대해서 6월 15일 암살해버렸다. 장쭤린은 자신의 사령부에서 자신의 동의도 없이 육건장이 살해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거기에 쉬수정이 봉천군에게 할당된 300만 위안 중 180만 위안만 지급해주고 일본이 제공해줬던 차관에서 자기 자신은 1천만 위안이나 차지했으면서 장쭤린에겐 200만 위안만 주자 장쭤린이 분노함으로 봉계와 환계까지 틀어지는 등(...) 북양군벌 내부 상황은 더욱 개판이 되었다. 게다가 쉬수정은 멋대로 동북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봉천의 치안을 어지럽혔고 이 때문에 봉천군의 중하급 장교들이 반발했다. 돤치루이가 중재에 나서 쉬수정이 주지 않은 120만 위안의 경비와 빌렸던 무기를 돌려주었으나 장쭤린은 쉬수정과 양위팅을 모두 파직하고 손열신을 부사령관에, 봉화를 참모장에 임명하여 환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