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법전쟁 (문단 편집) === 쑨원의 북벌계획 === 한편 쑨원은 9월 20일 '북벌 작전계획'을 제출, 내분에 빠져 혼란스러운 북양정부를 공격한다면 11월 말까지는 난징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쑨원은 북양정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베이징 정부]]에 소속된 군대는 30만 명 이상이나.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은 [[펑궈장]], [[돤치루이]]의 2파 세력을 합해도 6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북방군은 수만 많을 뿐이지 돤치루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남방을 침범할만한 자는 드물다. >---- >쑨원의 북벌 작전계획. 실제로 북양정부는 자신의 기반인 강소성에 전화가 퍼질 것을 우려한 화평론자 펑궈장과 주전론자 돤치루이의 충돌이 극심하였으며 내몽골, 산서, 산동, 하남에서의 반란과 독립 요구가 끊이지 않아 돤치루이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7개 사단이 고작이었다. 반면 쑨원은 10개 사단 동원이 가능하였으므로 체급 차이를 운용 가능 병력 수로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쑨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군대의 총수는 적군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각 사단의 결원 인원수로 2할을 빼낸다 하더라도 적군보다는 3분의 1이 더 많다. 실력을 비교해 본대도, 전투장비가 적군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점, 예컨대 보급력, 병력, 마필의 전투력에 있어서는 적군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남하한 적군에게는 지형과 기후에 익숙하지 못한 불리함이 있으므로 승산은 우리 쪽에 있다. 적군은 작전에서 병력을 우한 이남으로 집중시킬 것이다. 그들의 주력을 사천성, 호남성으로 보내기 위해, 또는 서쪽이나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도 그 지방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쑨원은 북벌 계획을 1, 2기로 나누었는데 1기는 중앙군이 광동, 광서에서 호남의 성도 [[창사]]로 진격하고 호남 전역에서 북양군을 몰아내는 와중에 좌익군이 사천을 해결하고 다시 동쪽으로 내려와 호북으로 들어오길 기다려 [[우한|우창]]을 공격해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좌익군은 사천성 북방을 방비하고 섬서와 산서의 적을 견제하며 제2기 작전의 호응을 기다린다. 우익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복건, 절강을 함락한 다음에 오송과 상하이를 점령, 난징에서 중앙군과 합류한다. 이렇게 장강 상하류의 적을 모두 소탕하고 오송을 근거지로 해군이 적함을 소탕하며 육군을 원호하며 전군이 난징을 총공격해 점령하는 것이 1기 작전의 끝이었다. 작전에 따르면 이 시기는 11월 말이어야 했다. 2기 작전은 장강 이북을 동영의 땅으로 정하여 보급물자를 비축하고 병력과 마필을 보충하며 장비를 정비하고 병력을 2개월 이상 휴식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3월이 되면 중앙군이 진포 철로, 좌익군이 경한철로로 북진, 우익군이 요서지구에 상륙, 좌익군의 지대가 섬서, 산서를 진군하며 본군을 원호하고 각군이 베이징에서 합류해서 총공세를 펼친다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