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홈스 (문단 편집) ==== 레반트 지역 시아파의 중심지 ====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남북으로 나누어 남부는 다마스쿠스, 북부는 에메사 (홈스)를 중심으로 분할하였다. (준드 힘스) 이때 5백여명의 사바하 (무함마드의 동료)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이 유입되며 홈스는 7세기경 시리아에서 무슬림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였다. 그럼에도 홈스 중심부에 위치한 성 요한 성당의 절반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마스지드 (모스크)로 개조된 것을 제외하면 시내의 교회들은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665년, 4대 칼리파 알리의 즉위와 함께 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가 벌어졌다. 이때 홈스 시민들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 대신 정통성을 지닌 알리를 지지하였는데, 661년 알리가 암살되며 무아위야가 승리하였다. 그는 홈스가 중심인 준드 힘스를 분할하여 시리아 북부를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준드 킨나스린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응징하였다. 이때부터 시리아는 3개의 지방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홈스는 우마이야 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의 거점으로 남았다. 특히 알리의 지문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설교단은 성유물로 여겨졌다. 한편, 우마이야 왕조 말엽 벌어진 3차 피트나 당시 홈스 주민들은 바누 카이스에 맞서 바누 칼브가 속한 예메니, 그리고 그 예메니를 선호한 [[왈리드 2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해되고 야지드 3세가 집권하자 홈스 시민들은 무아위야 1세의 증손자 아부 무함마드를 칼리파로 옹립하였으나 정부군에 패하였다. (744년) 다만 이후로도 홈스는 혼란을 틈타 반정부 도시로 남아있었다. 왈리드 2세 사후 744년에 야지드 3세가 요절하고 그의 후계자인 이브라힘이 양위하며 마침내 [[마르완 2세]]가 집권하였다. 제국 복원을 꾀한 마르완 2세는 745년 말, 우선적으로 홈스를 포위하였다. 포위는 무려 10개월이나 지속되었고 그 틈에 이라크 북부에선 앗 다하크가 카와리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746년 여름, 홈스는 함락되었다. 다만 3년도 못가 도시는 아바스 왕조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