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홈스 (문단 편집) ==== 9세기 중반: 연이은 반란들 ==== 압바스 왕조 시절 홈스는 수차례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854 ~ 855년에 일어난 반란이 가장 큰 규모였다. 9세기 중반 무렵 압바스 조는 튀르크 인들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삼았고 홈스에도 튀르크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가 시민들과 충돌한 것이다. 854년 가을, 튀르크 주둔군 사령관이자 태수인 무사가 홈스의 원로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하는 일이 벌어지자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튀르크 병사들이 다수 살해되었고 무사를 포함한 압바스 측 관료들은 [[하마(도시)]]로 도주하였다. 이에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후임 태수로 아랍인인 무함마드 이븐 압다와야를 파견하였고 이어진 협상에서 시민들은 그를 수용하였다.[* 그를 호위한 압바스 군대는 시민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도시를 포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븐 압다와야 역시 높은 세금을 유지시켰고 당시 시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폈다. 결국 855년 가을에 도시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2차 반란이 일어났다. 비보를 들은 알 무타와킬은 신속히 다마스쿠스와 팔레스타인 (라믈라)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3명의 원로들이 장살당한 후 십자가에 메달렸고 20여명의 시민들이 매질을 당한 후 제국의 수도인 사마라로 압송되어 성문에 효수되었다. 한편, 그렇지 않아도 타종교에 대한 불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알 무타와킬은 2차 반란을 그리스도교인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637년에 이슬람 제국군에 점령된 후 200여년간 무슬림들과 공존하던 홈스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때 추방되었고 시내의 교회들이 이슬람 사원 (마스지드/모스크)로 바뀌었다. 절반은 성당으로, 나머지 반은 모스크로 쓰이던 성 요한 성당은 이때 알 누리 모스크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다만 수십 개의 교회들은 이때에도 살아남아 현재에 이른다. 홈스는 이후로도 862년과 864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전자의 경우 태수 카이다르의 폭정에 의한 것이었고 그는 도시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850년대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새로 파견된 태수 알 파질을 수용하였다. (862년) 그럼에도 반란 세력은 여전하였고 이에 파질이 도당들을 처형하고 백명의 귀족들을 사마라로 압송하였으며 도시 성벽을 허물었다. 하지만 그의 강경 조치는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 하였고 결국 시민들은 아랍 부족인 [[바누 칼브]]와 연합하여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864년) 파질은 칼리드 궁전에서 농성하였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반군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반군은 그의 시신을 성문에 효수하고 몇개월간 반란을 지속하였으나 압바스 조의 튀르크 계 장군인 무사 이븐 부가에게 진압되었다. 878년부터 홈스는 툴룬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잠깐의 카라마트 수중을 거쳐 함단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944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