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홈스 (문단 편집) ==== 에메사 왕조 ==== 기원전 1세기부터 에메사를 다스리던 셈계 (아랍/아람인) 왕조는 군주임과 동시에 태양신 엘 가발 (엘라가발)을 모시는 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교일치 체제는 300여 년간 이어졌다. 그 시조격인 아지즈는 본래 베두인 족장이었는데 시리아로 이주, 오론테스 강가에 정착하였다. 그는 쇠퇴해 가던 셀레우코스 왕조에 개입하여 필리포스 1세가 데메트리오스 3세를 꺾고 즉위하게 도와주었고 그 후계자인 필리포스 2세의 대관식을 주관하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다. 아지즈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협조하여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로마의 요청대로 셀레우코스 조의 안티오코스 13세를 죽였다. (기원전 64년) 다만 삼프시케라무스 때의 수도는 에메사의 북쪽 교외에 위치한 아레투사였고 그의 후계자인 람블리쿠스 1세 (기원전 48 ~ 31년) 때에 에메사로 천도하였다. 에메사 일대의 화산질 토양 덕에 도시는 농업을 바탕으로 번영하였다. 도시 서쪽에 위치한 카티나 호수와 오론테스 강에 조성된 댐은 안정적인 농업 용수를 제공해 주었다. 그외에도 동쪽의 [[팔미라]]에서 페니키아로 향하던 상인들이 왕래하며 에메사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도시였다. 한편, 람블리쿠스 1세는 왕실과 폼페이우스 간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전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전투 당시 그에게 지원군을 보내주었다. 그 대가로 람블리쿠스 1세는 로마 시민권과 율리우스 성을 하사받았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람블리쿠스 1세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당시 시리아는 그의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의 수중에 있었고, 그는 람블리쿠스의 동생 알렉시오스 1세를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 람블리쿠스는 살해되었고 알렉시오스가 즉위하였으나 (기원전 31년) 같은 해 [[악티움 해전]]으로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시오스를 반역 혐의로 처형하였다. 이후로 에메사는 시리아 속주의 자치 도시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람블리쿠스 1세의 아들 람블리쿠스 2세 (기원전 20 ~ 서기 14년)를 에메사의 왕으로 임명하며 왕조는 복원되었다. 람블리쿠스 2세가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그의 아들 삼프시케라무스 2세 (14 ~ 42년) 29년간 재위하며 에메사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콤마게네 왕국]]의 공주 로타파와 결혼하였으며 에메사 일대 한정이긴 하지만 삼프시케라무스 2세는 대왕 (Regis Magni)으로 추앙되었다. 그의 치세인 32년에 에메사는 헬리오폴리스 (바알벡)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재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지즈 (42 ~ 54년)는 52년 경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헤롯 왕국의 공주 드루실라와 결혼한 일화가 있다. 하지만 드루실라는 곧 로마의 유대 총독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져 이혼한 후 그와 결혼해버렸다. 아지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고 동생 소하이무스 (54 ~ 73년)이 계승하였다. 그는 친로마적 태도를 강화하여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에 궁수들을 파병하였고 72년 외가인 콤마게네를 로마가 합병할 때도 반발없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소하이무스의 친로마 정책에도 불구하고 73년에 그가 사망하자 에메사의 자치권은 박탈되었다. 소하이무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2세는 국왕 대신 로마 제국의 에메사 총독이 되었다. 이후로 시리아의 율리우스 가문은 태양신 엘 가발에 대한 제사장으로의 활동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엘 가발 신전의 사제는 금으로 수놓인, 발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보라색 튜닉을 걸쳤고 각종 보석이 박힌 왕관을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