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홈스 (문단 편집) ==== 3세기의 위기 ==== 에메사 황가 이후 로마 제국은 238년의 여섯 황제의 해와 연속으로 암살된 두 황제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부스 아라부스.], 또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한 [[데키우스]]를 거치며 쇠퇴하였다. 데키우스를 이은 트레보니아누스는 253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공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같은 해에 게르만 족이 재차 남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게르만 족을 격퇴한 [[아이밀리아누스]]가 봉기하여 그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역시 반역자 처단을 외치며 봉기한 라인 군단의 [[발레리아누스]]에게 패하여 죽었다. 세 황제의 해 (253년)를 거치며 로마의 국방력은 더욱 악화되었고 254년, 샤푸르 1세는 재차 시리아를 침공하였다. 이때 235년부터 에메사의 총독을 맡았던 에메사 왕가의 후예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이란군을 격퇴하고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260년,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 나선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며 3세기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해 [[갈리아 제국]]이 독립하였고 267년에는 오데나투스가 사망하자 부인 [[제노비아]]에 의해 [[팔미라 제국]]이 세워졌다. 이듬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가 암살되며 분열은 장기화 되었다.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고트족을 격파하였으나 병사하였고 270년, [[퀸틸루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부를 정비한 후 272년, 시리아 정벌에 나서 안티오크에 이어 에메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팔미라 군을 격파하였다. 제노비아는 포로가 되었고 팔미라가 항복하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에메사의 엘 가발 신전을 찾아 감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다만 에메사의 주요 교역 상대였던 팔미라가 몰락함에 따라 도시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