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무제 (문단 편집) == 일화 == * 어느 날 주원장이 《[[맹자]]》를 읽다 한 대목에서 크게 노한다.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라고 명령했다.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한 주원장은 명령을 내린 뒤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죄명에 '대' 자가 붙으면 '그 죄를 범한 자는 죽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정말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전당은 끔찍하게 살해당할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마 황후가 만류한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했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1394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맹자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자신의 말이 정말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쌍두마차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맹자를 탄압했다가는 전 중국의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이는 아무리 주원장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었다. 유삼오는 모두 260개 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 장을 삭제하고 172개 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되었다.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 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 27년(1394년)에 반포되어 과거 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 12년(1414년) 성조 영락제 주체의 명령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 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사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주원장 특유의 의심많은 성격과 명나라 건국 초기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안배가 합쳐진 결과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고아에 천민 출신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원장에 반발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이를 가차없는 숙청으로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주원장은 온갖 영웅호걸이 나타나서 활개치던 중원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미천한 신분이었다. 심지어 평민 출신 황제였던 한고제 유방조차도 주원장 정도는 아니었고, 비록 낮은 직위기는 해도 사수정의 정장이라는 벼슬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주원장 입장에서는 군주의 덕치를 주장하고 지방의 지주들인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맹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원장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던 것. 그러나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가 즉위할 때 쯤이면 이미 황권은 안정되어 있었고, 때문에 굳이 《맹자》를 검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서민 출신으로서 일개 세력의 대장이 되었다가 통일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과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전한]] [[고제(전한)|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비교도 자주 되는 편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가족애가 대단한 대신 신하들에게 가혹했고, 유방은 자녀들에게 매정한 대신 신하들에게 너그러웠다. 그리고 유방의 토사구팽 이미지는 과장과 왜곡이 가미된 편으로, 유방 사후에도 상당수의 개국공신들이 요직에 있어서 이후 외척인 여씨들을 숙청하고 유씨 황실을 지키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사실 유방이 자녀들에게 매정했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 과장이 있는 편이다. 실제로 유방이 죽인 자녀는 공신과 마찬가지로 거의 없었다. 폐위를 생각한 혜제도 실제로는 여씨 견제를 위해 그런 거고 또, 황제의 힘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지 실행하지는 않았다.][* 공신들 숙청도 실제로는 한신, 팽월, 영포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은 사실 통일 한나라의 공신이긴 했지만 동시에 위험인물이었고 또, 황제가 처벌할 만큼의 죄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처벌은 유방이 아니라 여후가 주도했고 또, 신하들 중에서도 이들을 위험시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주원장의 공신 숙청은 진짜였고, 공신들 대부분이 숙청당하다보니 [[정난의 변]]에서 손자인 건문제를 보필할만한 유능한 장수들이 별로 없었다. *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숙청해대고, 또 권력 강화를 위해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 얼마나 많았던지 하루에 처리하는 상소문이 무려 '''1,600개'''나 되었을 정도였다. 이건 홍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느라 재상을 폐지하면서 생긴 현상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홍무제도 감당이 안되어서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그것이 '''내각'''이었다. 물론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짜리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을 [[내각대학사]]라 하며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 관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 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 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된다. 명말 신종 만력제때의 재상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 자리나 다름없는 내각 수석대학사 또는 내각수보로서 국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 이것은 제4대 인종 [[홍희제]] 때 편법을 써서 겸직 벼슬로(2, 3품직)로 품계가 상승했고, 이어서 고위급 명예직의 겸직(태자 태, 소OO)으로 종1품, 정1품으로 상승시켰다. 이때쯤이면 사실상의 재상이었지만, 단지 재상(승상)이라는 직명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명나라 특유의 절대군주제로 인해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사들은 말 그대로 재상급 비서로서 황제를 보좌했다.] 황제가 [[만력제|맘먹고 근무를 태만하게]] 하면 답이 없었다. * 중국의 <베이징커리> 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 태조 주원장을 꼽았다.[* 과거 중근세에도 배울려면 어느정도 교육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데 주원장은 문자그대로 길바닥에서 남에게 빌어먹어야 할 시기까지 보냈어야했던 사람인데 책자를 구한다거나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한다는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은 공자든 맹자든 충을 강조하는 유학 성현의 이론을 최대한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의 권위와 통치를 안정화하려고 했는데 신권에 유리한 내용이 나왔다는 이유로 덜컥 화를 내는 걸 보면 확실히 주원장의 인문학적 소양은 다른 황제들보다 한참 떨어졌던 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빈민 출신이어서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어진 군주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또한 빈민 시절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큰 실책을 저지른 바도 있었다. 명나라 건국 후 자신의 가난한 고향을 크게 발전시켜보자고 수도를 고향인 봉양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결국 입지조건이 적절치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문제는 작고 가난한 고을인 봉양을 수도로 건설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인데, 천도가 취소되었음에도 큰 도성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은 못버려서 이곳 주민들이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좁고 척박한 땅에 갑자기 수많은 인구가 모여들다보니 도리어 자기 고향인 봉양의 경제가 파탄이 나 버렸다.[* 재밌게도 이것도 한고제 유방과 반대되는 사례인데, 유방은 패현 땅에 애정이 없진 않았지만 [[옹치]]와 함께 자신을 배신했던 섭섭함도 컸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특별대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유태공]]이 고향을 그리워할 때도 고향 땅 자체를 건드리진 않고 수도 장안 주변의 마을을 비슷하게 꾸민 뒤 고향 이웃들을 불러오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죽기 직전에 향수병이 북받쳐서 고향으로 찾아왔을 때 고향 사람들의 부탁으로 세금과 복역을 면제시켜주긴 했지만, 그때도 풍읍은 제외하려고 했다.] 또한 주원장은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해서 툭하면 부모 형제 일족이 쫄쫄 굶은 트라우마가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손들은 절대 굶는 일이 없도록 하겠답시고 황실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확립했는데, 일단 조금이라도 자기 피를 이은 주씨 성의 남계 후손이기만 하면 최소 200석의 녹봉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에서 1개 현을 관리하는 지현의 녹봉이 겨우 90석이었다.] 물론 이것도 8대 이상까지 거리가 멀어진 방계의 경우에 해당되는 최저 녹봉이고, 친왕급으로 가면 더 높았다. 문제는 황실 자손들이 눈덩이 굴리듯 불어서 명나라 말기에 가면 무려 200,000명이라는 숫자를 자랑했다. 이 20만 명의 인구를 전부 명나라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했으니, 결과적으로 그 부담이 [[백성|누구]]한테 갔는지 생각해보자. * 주원장이 얼마나 일을 많이 처리했는지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홍무 17년인 1384년의 9월, 급사중 장문이 이에 대해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황제 폐하)는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딱 8일 동안 나라 안 팎에서 올린 1,660개의 상소문에 올라와 있던 3,291건의 일을 해결하셨다." * 하루는 형부 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올린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주원장이 보기에 상소문의 서문에 있는 황제 찬양이 지나치게 길었고, 정확히 '''6,370자'''까지 읽자 보다못한 주원장은 결국 여태소를 친히 두들겨 팼다. 다음 날, 아무래도 상소문의 뒷부분이 신경 쓰였던 주원장은 이걸 도로 찾아다가 계속 읽었고, 총 '''16,500자'''를 넘어가자 겨우 서문이 끝났다. 반면에 본문의 글자 수는 총 500자로 5건의 건의사항이 담겨있었는데, 읽어보니 취할 점이 꽤 있다 싶었던 주원장은 이 가운데 4건을 즉시 실행했다. 그 뒤 홍무제는 여태소를 불러서 오해가 있었다는 언급을 하고 사과한 뒤 그의 정책을 칭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글을 번잡하게 쓰지 말라고 말한 뒤 이 일화를 전국에 널리 알렸다. 즉 주원장이 무식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전근대 중국에는 '''당팔고주의'''란 것이 있어 관공서용 문서 작성, 특히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형식이 있었고 여러 문학적인 기교가 가미된 황제 찬양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 뿐만이 아니라 전근대 왕조 국가에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흔히 행했던 것인데 한마디로 주원장이 흙수저 출신이라 이게 황실의 권위를 세우는 방편이라는 걸 몰라서 벌인 일이었다. 참고로 당팔고주의는 명태조 주원장의 시대로부터 500년이 지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시점에야 없어졌다. 주씨 황실의 권위 확립을 위해 공포정치도 마다하지 않았던 주원장인 만큼 만연체(蔓衍體) 황제 찬양의 목적을 알았더라면 여태소를 그렇게 두들겨 패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원장이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자기는 무식해서 권위를 세우는 관행을 갖고도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주원장의 신하들은 이래도 처맞고 저래도 처맞고 더러워서 그만둘 수도 없는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황제 생활을 오래 하면서부터는 공부도 하고 사람이 좀 바뀌긴 했다. * 이희안(李希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크게 대단한 학자는 아니었고, 다만 인품이 뛰어나서 과거시험을 보라고 주위에서 권유를 받던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세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은거하던 기인이었는데, 어디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홍무제는 '''친히 손수 편지(手書)를 써서''' 보냈다. >"그대가 학문에 대해 조예가 있다고 들었다. 이번에 황자들이 공부할 대본당(大本堂)을 지었는데, 황자들을 가르칠 스승이 필요하니 궁에 와서 벼슬을 받도록 하여라." 편지의 내용은 초대였지만 그당시 황제의 친필 서한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경을 치게 되니 사실상 명령과 다름 없었다. 결국 이희안은 조정에서 벼슬을 받았는데, 황궁에서는 비단 옷을 입고 도롱이갓(蓑笠, 그러니까 [[삿갓]])을 쓰는 기묘한 패션으로 주목을 받았다. 왜 행색을 그렇게 하고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머리에 쓴) 삿갓은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고, 비단 옷은 황제께서 하사한 거(라 입고 다닌)다."(笠本質, 緋, 君賜也) 이런 기인이었던 이희안이 들어가게 된 곳은 대본당으로 황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맡았다. 일개인으로 살 때는 자유분방을 추구했어도 교육자로서는 엄격한 규범을 중시한 이희안은 어린 나이[* 홍무 원년(1368년)에 맏이인 태자 [[주표]]가 13세였다.]에 주원장이 홍건적으로 활동할 때 태어나 도적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자란 황자들은 규범은 고사하고 어른을 대하는 황실의 예법도 잘 지킬 줄 모르는 개구쟁이들이어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보통은 아이이고 하니 혀나 좀 차면서 적당히 공부 가르치는 시늉만 하는 게 보통일 텐데, 하필 또 이희안은 적당히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다시 규범을 가르치려고 시도하던 이희안은 황자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화가 갑자기 치솟아서 자기가 대본당에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그중 하나를 붙잡은 다음, 자기가 시골에서 마을 아이들 가르칠 때처럼 '''머리통을 잡고 이마를 후려깠다'''(擊其額)! 먼 방계 황족도 아니고 황제의 아들에게 물리적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이 어린 황자는 아버지 홍무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사실에 대해 고했다. >'황제가 (이마를) 어루만지며 성을 냈다.'(帝撫而怒) 천하의 대명 천자께서 마치 유치원에서 자기 아들이 친구에게 얻어맞다 오자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마를 이 정도나 다쳤네!" 하는 보통 아버지들처럼 아들의 부어오른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화를 냈다는 것이다. 평소 황실의 권위에 극단적으로 집착하는 주원장의 성질대로라면 이희안은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도 마 황후가 한 발 앞서서 이희안을 두둔했다. >"선생께서 스승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려는 것이니, 이는 노하실 일이 아니옵니다."(烏有以聖人之道訓吾子, 顧怒之耶) 황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홍무제는 이희안의 벼슬을 되려 좌춘방(左春坊)의 우찬선(右贊善)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한편 이 사건을 두고 기록에서는 '엄히 벌하였다' 정도로 돌려 말하지 않고 '칠 격'(擊) 자로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북원의 [[코케테무르]]가 이끌고 있는 수만 명의 기병도 명나라 황제 아들에게 격 자를 쓸 상황을 만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자신이 나중에 묻힐 장소 근방에 [[오나라]]의 초대 황제였던 대제 [[손권]]의 능이 있어서 황릉을 만들기 위해 다른 무덤들처럼 파헤쳐질 상황에 놓였으나, 주원장이 묘지기인 셈 치자며 그대로 두라고 지시한 덕분에 손권의 능은 무사하게 되었다. 때문에 명효릉 내에서 손권의 능을 볼 수 있다. 이 일화가 무조건 다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재밌는건 600여년이 지난 뒤 [[쑨원|한족국가를 회복한 주원장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사망한 뒤 그의 무덤이 명효릉 바로 옆에 지어졌고 황제가 아니었지만 중산'''릉''' 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규모와 상징성이 주원장의 명효릉보다 거대하기에 명효릉은 [[중산릉]]을 본 다음 들리는 마치 묘지기 같은 위치에 있다. *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에게는 무자비한 황제였지만, [[http://pgr21.com/?b=8&n=69738|자신이 정벌한 군벌들의 자손들에겐 되려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숙적 [[진우량]]의 아들 [[순덕후|진리]], [[명옥진]]의 아들 [[명승]]을 [[고려]]로 보내 융숭한 대접을 받도록 배려해 주었고, 붙잡은 몽골의 보르지긴씨 황족에게도 굴욕을 주지 않고 곱게 대접했다. ~~그렇지만 진우량의 병사들 수백만 명은 홍선에 태워 청나라 건국 이전까지 지옥생활을 하도록 했다.~~ 항상 그렇지만 주원장의 숙청 기준은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위협이 되느냐 마느냐였기 때문에, 공신들은 눈치를 봐도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 쳐죽이기 일쑤였던 반면, 일개 백성은 자기를 뒤에서 욕한다고 해도 대놓고 선동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닌 불평불만 표시 정도로는 딱히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그냥 욕만 하고 끝이니까. * 편집증적인 꼼꼼함과 기억력 덕분에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은원을 모두 잊지 않는 인물이었다. 즉 잘해준 사람들은 그만큼 대우를 받았고, 주원장에게 정당하지 않은 걸[* 다만 개인 원한을 숙청에 써먹지는 않은 듯싶다. 그랬으면 아예 국가 유지가 안 됐을 테니까.]로 원한을 샀으면 당장 황궁에 찾아가 빌어야 했다. 한편 고려의 [[정몽주]]는 그 기억력 덕에 목숨 걸고 사신으로 왔다가 공을 세울 수 있었다. [[http://egloos.zum.com/xuecheng/v/4210102|홍무제의 강박증 때문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 * 본인이 신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직접 [[모스크]] 건설을 지시하고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https://en.wikipedia.org/wiki/The_Hundred-word_Eulogy|했다]]. 대신 원나라 때 유입된 [[후이족|회회인]]들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한족과 통혼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원나라 때 전래된 중세 이슬람 역법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면서 회족 천문학자와 한족 천문학자에게 협업을 지시했는데 그 결과물이 [[회회력]]이었다. * [[중국 요리]] 중에는 홍무제와 연관된 설화가 있는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중국식 두부전인 '''샹또우푸'''(鑲豆腐)의 경우, 주원장이 빈곤한 시절 샹또우푸를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 맛을 알았고, 황제가 된 후 궁중 요리사에게 이 음식을 만들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두부를 [[곰팡이]]로 발효해서 요리하는 '''호피모두부'''(虎皮毛豆腐)의 경우, 훔친 두부가 썩어서 곰팡이가 피자 주원장이 아까워서 그거라도 먹었더니 의외로 맛이 좋아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두부를 발효해서 만든 음식을 즐긴 게 현대의 호피모두부라는 이야기가 있다.[* [[취두부]]의 기원 일화와 약간 비슷하다.] 또 '''진주비취백옥탕'''에 관한 일화도 있는데, 주원장이 거지로 지내던 시절 어떤 가난한 노파가 [[꿀꿀이죽|먹다 남은 두부와 채소를 같이 끓여서 만든 요리]]를 대접한 적이 있었고, 맛있게 먹었던 그 요리를 잊지 못한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다시 그 요리를 찾았지만 이미 주원장의 혀는 온갖 산해진미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 때 느꼈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판본의 엔딩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노파가 이것을 설명해 줘서 주원장이 초심을 찾고 교훈을 얻는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요리사가 고급 식재료를 써서 모양새만 비슷하게 흉내낸 요리를 주원장이 맛있게 먹었다는 다소 블랙유머스러운 결말이다. * 《명사》(明史) 권 300 <외척전>에 따르면 [[주세진]](주오사)의 장인, 즉 홍무제의 외조부는 원나라와 남송의 마지막 혈전이었던 '''[[애산 전투]]'''의 생존자였다고 한다. 몽골에 의해 한족 왕조가 종언을 고한 애산 전투의 생존자의 후손이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웠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명사》를 집필한 주체는 청나라였으므로 청나라에서 명나라 황실을 띄워주기 위해 거짓 내용을 남겨놓을 리도 없고, 일부러 윤색을 하려면 친조부로 하는 게 더 좋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부적인 내용에서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허구는 있을 수 있어도 홍무제의 외조부가 애산 전투의 참전자라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어진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황제 등극 후 어진을 그리게 했는데 화공이 실제 홍무제와는 전혀 다른 미남으로 그려놓자 아첨꾼이라며 죽였다. 이에 다음 화공은 홍무제의 얼굴을 사실대로 그렸는데 못생기게 그려 기분 나쁘다고 죽였다. 결국 세 번째 화공이 묘안을 냈는데 곰보 투성이의 못생긴 외모는 그대로되 인자하고 푸근한 모습으로 그려놓자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약간 비슷한 이야기로,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대로 그린 화공도 죽이고 잘 생기게 그린 화공도 죽였지만 세 번째 화공은 왕이 한쪽 발을 돌 위에 디디고 한쪽 눈을 감으며 활을 조준하는 그림을 그려서 사실대로묘사하면서도 결함도 적당히 덮어감췄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