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범도 (문단 편집) === 항일 활동에 투신하다 ===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히는 [[사격]] 실력을 보유했다고. 현대 총기로도 이 정도 사격 실력은 쉽지만은 않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당시 [[총기]]의 성능을 고려해 보면 더욱 놀라운 실력. 이 실력으로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북한)|강원도]] [[회양군]]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유는 [[일본 제국|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의병 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였는데 동료들을 먼저 가라고 한 뒤에 홀로 [[경기도]]와 [[강원도]], [[함경도]]를 연결하는 철령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 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는 딱히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07년]] [[고종(대한제국)|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군|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속 수백 리를 [[축지법]]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때 민중들에 의해 '나는(날- + -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머슴]]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머슴살이를 했기에 엄청난 힘과 체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도 우람했으며 [[근육]]량도 엄청났다고 한다. 포수 생활을 하면서 산을 자유자재로 넘었던 원동력인 셈.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 이옥구(이옥녀)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남편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협박에 '''"계집이나 사내, 영웅호걸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1달 후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군|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2021년]] [[3.1절]] 기념식 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해군잠수함사령부]] [[손원일급 잠수함|홍범도함]]에서 근무하던 여명훈 중위가 대신 받았다. [[https://youtu.be/VQBvEIa21lE?t=1809|영상]].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가서 너희 아버지더러 투항하라고 해라"며 그를 홍범도에게 보냈지만, 의병부대를 찾아간 홍양순은 도리어 아버지를 따라 의병대원이 되었다고 한다. 홍양순이 홍범도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차남 홍용환도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1910년]] 결국 [[경술국치|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소련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