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필리핀]] === 공주령 학교 부교장으로서 기갑전술교리를 연구하다가 1944년 3월에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그리고 10월에는 남방총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책임자로 발령되었다.[* 이후 필리핀이 외부에서 지원을 못 받게 되자 병참 부서가 할 일이 없다고 하여 알아서 먹고 살게 해준다는 뜻으로 '자활감'으로 명칭을 바꾼다.] [[중장]]으로도 승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존재한다. * 홍사익 장군을 [[필리핀]]으로 부른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3연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홍사익 장군은 그 밑에서 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야마시타는 홍사익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진짜 능력에 따라 발탁한 스카우트였을 수 있다. * 사실 1944년의 필리핀을 본다면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홍사익 기용은 그 능력을 대단히 신뢰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야마시타의 전술은 루손에서 최대한 농성하면서 본토나 [[오키나와]]로의 미군 진격을 늦추고자 하는 것이고,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맥아더의 군대에 저항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농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병참감의 업무는 실로 막중한 셈이다. * 당시 [[일본군]]의 포로관리 및 지원 분야에 군인, 군속을 불문하고 조선인이 많이 복무하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지역 포로수용소에서 이들이 사보타주 내지는 반일 봉기를 벌인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망이 있는 조선인(홍사익)을 그 관리자의 위치에 올리고자 했다.[* [[김정렬(1917)|김정렬]]이 이런 추측을 했다. 김정렬은 젊을 때 홍사익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 홍사익이 [[만주]] 지역[* 남방에 가기 직전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함께 만주에 있었다.]의 조선인 군 장병 및 민간인의 경애감을 너무 많이 얻고 있어서 혹시나 그를 핵심으로 하여 발생할지 모를 불온한 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남쪽으로 보낸 것이다. 소수설로 '패전하면 누군가 포로 학대의 책임을 져야 하니 홍사익을 희생양으로 내세웠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본의 인사권자 그 누구도 패전을 예상한 적 없고, 전쟁이 끝나고 전범 재판이 벌어져 ABC급 전범들이 처형당한다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매품으로 포로 학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로수용소에 조선인 포로 감시원 3400명을 투입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무리한 추정. 그냥 일본군이 부족하니 포로수용소의 일본군을 교체해주기 위해 조선인/대만인들을 쓴 것일 뿐이다. 홍사익이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자가 된 것 역시 단순한 인사이동. 그렇다고 식민지 출신 장성을 일선 지휘관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선인 중좌, 대좌가 여럿이지만 대대장이 한계로, 핵심 지휘관인 연대장, 사단장은 주어지지 않았다. 홍사익 장군조차 연대장과 사단장은 못 해봤고, 여단장만 해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