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패전과 전범재판 === 원체 여건이 열악한 루손 산지에서 극심한 식량 부족 상황에서 예하에 거느린 [[일본군]]과 아직도 붙잡고 있던 포로에다 같이 피난한 일본 민간인들을 위한 식량까지 마련해야 하는 위치를 맡아 고생하던 중 일본이 패전했으며,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아남은 [[부관]](일본인)이 후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육사 동기와 후배들은 죄다 국군에 들어가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특히 [[이응준]] 대좌는 일본군 최선임자로 미군에게 지목되어[* 만주군 최선임자는 [[원용덕]] 중교이고, 중국군에선 [[조개옥]] 중교가 선택되어 이들 셋이 합작으로 국군을 만든다. 좌익과 상당수 광복군계는 참여를 거부하였는데, 초기에는 [[송호성(군인)|송호성]]이 광복군계 최선임자로 참여하였으나 이후 얼마 안가 힘을 잃었다.] 국군 창설 작업을 맡았다. 홍사익 역시 살아 있었다면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대표적으로 홍사익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존 리드 하지]]를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31/2009083101915.html|전봉관의 인생백경]],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122370319|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비롯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구명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http://blog.daum.net/koreanmarinecorps/15770|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동조하는 증언이 아예 없으며,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한 주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