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의 [[아일랜드인]]처럼)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조선인으로서 당한 멸시를 아들이 호소하자)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사실 이게 자기정당화적 변명이 아니라 진중한 신념이었다 하더라도 굉장한 역사적 오독이란 비판은 피할 수 없다. 아일랜드는 역사 내내 엄청난 탄압과 인격적인 모독을 국가적 행사를 통해서까지 받으며 지냈고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부러 영국계와 영국계 종교신앙자들을 몰아서 배치한 북아일랜드 지역을 빼고는 기어이 독립을 성취해서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곳이다. 아일랜드인들이 떳떳하게 숨기지 않고 행동한 것이 영국으로부터 인정받거나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체가 아예 민족가 언어도 다르고 역사 내내 영국에서 핍박받으며 간섭받은 역사 때문에 민족의식이 더더욱 고취되어서인 것이다. 실제로 철의 여인 대처가 아일랜드 투쟁가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정말로 영상실조로 피와 가죽 밖에 안남을 정도의 상태까지 가서 아사를 해버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둬서 엄청난 반감을 얻었고 이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상식밖의 대우 때문에 영국내에서조차 반감으로 인해 대처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질 정도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를 유화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사실 당시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며,[* 3.1운동 직후 일제의 집요한 독립운동 탄압으로 국내의 독립 주도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동시기 1차대전 특수 등으로 일본의 경제가 발전함과 동시에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풀리게 된다. 즉 일제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의 향상으로 점차 독립 같은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선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고,[* [[아일랜드]]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이런 방법으로 독립한 것처럼 '''보였던''' 예가 있어 아주 헛된 꿈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건 영국-아일랜드 관계사의 디테일을 모르는 외부인의 오독에 불과하다. 가톨릭 해방운동의 대부 대니얼 오코넬부터 시작해서 19세기 중후반쯤 되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을 필두로한 영국 의회 내에서 비폭력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 1차 세계대전 직전쯤 가면 아일랜드 자치법이 영국 정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될 만큼 성장하긴 했으나, 가장 결정적으로 1차대전 발발로 인해 아일랜드 자치법 관련 논의 자체가 무산되고, 세계대전과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절부터 현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되는 얼스터 친영주의자들 중심으로 적극적인 자치반대운동, 친영 운동 또한 들끓어서 1910년대쯤 되면 점진적 투쟁론은 이미 좌초되고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고착 상태를 결정적으로 깨트리고 당시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들 모두 서서히 말라죽는거 아닌가 걱정하던 아일랜드 자치, 독립 의제 자체에 다시 불을 댕긴건 레드먼드 같은 영국 원내 아일랜드 의회당의 점진론적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뿌리깊은 과격 급진 아일랜드 무장 봉기 전통을 부활시킨 1916년 [[부활절 봉기]]였다. 결국 아일랜드 독립 또한 결정적인 급진 무력 투쟁이 수반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한일관계에 대입해도 외부적으론 악독한 제국주의를 폈어도 어쨌든 국내 정치에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회 의석까지 내줄 자유주의적 입헌정치 전통이 강력했던 영국과 일제를 비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나마도 꿈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타협주의자들도 나오게 된다.[* 이런 타협주의자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을 롤모델로, 일본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유지한 채, 출신지역 등으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고 조선출신도 내지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을 제 1 목표로 하게 된다. 이들이 [[내선일체]]를 적극 환영한 이유도 이것인데, 그들은 정말로 내선일체가 모든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해주려는 정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 출신은커녕 일본 본토인들끼리도 지역, 출신 등으로 차별이 이루어지는 판국이다보니 이는 허황된 꿈이었다. 참고로 이들 타협주의자에 대한 시각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하나'와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게 아닌 민족의 동등한 대우를 위한 목적이라서 정상참작은 해줄만 함'의 두 가지인데 대체로 전자의 시각이 강하다. 사실 그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실제 그랬듯이 스스로 독립할 순 없고 일본이 시켜줘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