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도쿄]]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후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령부에서 병참감으로 근무하였다. 제해권의 상실로 본국으로부터 물자가 조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홍사익은 나름 자력갱생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한편, 병참감으로서 홍사익은 포로들에 대한 최고관리책임자 자격이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필리핀 지역에서 자행된 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의 책임을 지고 홍사익이 사형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