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창씨개명 거부 === 홍사익은 왕족이 아니면서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조선인]]인데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다. 더불어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먼저 유명한 이야기로 새 부대로 보직을 옮기게 되면 전 장병을 앞에 놓고 부임인사를 할 때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 천황 폐하의 명으로 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어]]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조선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조선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아들 홍국선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도 [[한자]]와 [[일본어]]로 썼고,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こう しよく)"로 칭했다.[*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사실 홍사익의 앞선 행적들을 보면 이해하기 크게 곤란한 부분도 아니다. 홍사익은 골수친일파에 전범으로 처형당한 사람이지만, 앞선 다른 문단의 서술에서처럼 조선인으로서의 복잡한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료나 군인 등의 공무원은 소속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직업윤리와도 직결되므로, 일제에 충성하기 싫으면 그냥 때려치고 나오던가, 그렇지 못하고 그 업을 지속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규복이나 손영목처럼 "관료로서 종사하되 조선인을 계몽하고 차별에 맞선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영국-아일랜드의 사례를 끌어다오기도 했는데, 홍사익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아들인 홍국선에게 했던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오늘날 우리식으로 쉽게 해석하자면) "우리가 정복당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립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인종차별에 맞서는 느낌 정도였던 것 같다. [[김석원]]의 경우에서 보듯, 일본군에 복무하던 조선인들의 심경이 어느 정도 복잡했던 것도 사실이며, 특히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으로 인해 "좋은 군인이었는가"와 "좋은 조선인이었는가"는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의 군대에 복무하던 피식민지 군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양차대전에서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을 도운 인도군만 해도 인도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친영 부역자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생각이고, 인도 내에서 양차대전의 인도군을 부역자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당장 영국의 전몰자 추도일에 인도 대표들이 다른 영연방 대표들과 함께 참석해서 양차대전에서 싸운 인도군 병사들을 기리는 모습을 매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선전했던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권]]은 위선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독립 역시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높게 쳐 줘도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사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이 인도의 사례처럼 2차대전에서 일제의 승전 혹은 소모전에 이은 휴전 이후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뤄졌다면, 이들도 달리 평가받았을 수 있다. 문제는 영프와는 달리 일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승전했어도 식민지를 놔줬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하다못해 다른 식민지들은 해방시키더라도 한반도만큼은 최종 보루로 여겼으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제가 생산력으로 상대가 안 되는 미국을 친 시점에서 "소모전 끝의 휴전"이란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고, 단기결전으로 이기느냐 실제 역사처럼 질질 끌다 끝내 항복하느냐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들은 몰라도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배웠다는 고위 장교나 지식인들이 이런저런 정황을 보면서도 항전 대신 협력을 택했다면 짧은 식견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제시대 자체를 다루는 사회사학계의 동향은 당장 1940년대 중순쯤 되면 교육 못받은 시골 촌부들도 어디 동네 요강, 소나무 껍데기나 긁고 있는 꼬라지 보고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진다는 걸 감지했던 사람들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다.''' 어디 경상도 깡촌 농부들도 일본이 질 것 같다는 걸 직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 교육 받거나 사관학교 나온 양반들이 "일본이 그리 일찍 망할 줄 몰랐다"는 식으로 내놓는 변명은 막상 동시대 사람들에게 통하지도 않았을 소리라는 뜻이다.] 크게 괘념치 않고 '그냥 이대로 군 생활 열심히 하다가 전역하고 나면 다른 일 해야지'라고만 생각하며 살았던 결과로 역사가 그를 반민족행위자라고 평가하게 됐다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해 한번쯤 [[반면교사|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는 홍보를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