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익 (문단 편집) === 육대 졸업 이후 === 육대를 졸업한 뒤에는 원대인 1연대로 복귀했다가 동 연대 예하 중대장(대위), 참모본부 내국전사관, 1사단 3연대 3대대장(소좌), 육군보병학교 교관, 만주국 군정부 고문관,[* 여기서 복무중 중좌 진급.] 관동군 참모부,[* 조선인 관계 사무를 보았다.] 다시 육군보병학교 교관,[* 여기서 복무중 대좌 진급.] 흥아원 조사관 등을 전전한다. 이중 대대장 재임 시절, 상관이었던 연대장 두 사람이 [[나가타 테츠잔]]과 [[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1941년]] 3월에는 드디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 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 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 제18전총.]를 상대로 여러 번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 [[김원봉]]의 오랜 고향 친구.]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은 충칭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했다. 그에 따라 화북으로 옮긴 조선의용대 다수는 제2인자 자리에 있던 [[윤세주]]의 지휘를 받게되었고, 후에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한다.]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省) 타이항(太行)산맥의 '후자좡(胡家庄) 전투'와 인근의 '싱타이(邢台)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는데, 여기서 홍사익이 지휘를 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1916)|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여기서 그는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김학철은 체포 후 일본교도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를 절단해준다"고 했으나 다리가 썩어가고 있음에도 끝내 거부했다. 그러다가 교도소 [[의사]]가 교체된 후 인도적 차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주었다. 그리고 김학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는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는 '일본군 토벌대의 지휘관'과 '무장독립부대의 지휘관'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42년에는 여단장에서 다시 [[만주]]에 특별히 설치한 기갑전술연구 겸 교육부대인 공주령 학교 부교장으로 발령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