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위병 (문단 편집) === [[토사구팽]] ===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을 비롯한 지도층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사이에 [[마오쩌둥]]이 다시 한번 권력을 잡게 된다.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국가주석]]'''이었던 [[류사오치]]는 홍위병에게 잡혀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고, 당서기 [[덩샤오핑]]도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집단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을 정도. 그의 아들 덩푸팡은 고문에 못이겨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않고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게 된다.[* 덩푸팡은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활약했으나, 중국장애인협회를 운영하면서 온갖 이권에 개입하는 [[부정부패]] 행각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마오쩌둥]]조차도 홍위병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홍위병 일파들은 파벌분열과 반목을 하여 자기들끼리도 싸움질을 벌이게 되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의 아버지 [[모이창]]이 [[부농]]이라고 공격하는''' 대자보를 붙이기에 이른다.[* 그런데 모함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아버지는 실제로 [[부농]]이 맞다. 자수성가한 위인으로 비록 [[마오쩌둥]]과 사이는 안좋았지만 교육열이 높아 마오쩌둥에게 투자도 많이 해주었고, 마오쩌둥은 젊은 시절 아버지 재산을 넉넉히 물려받아 유복하게 살기도 했다.][* 사실 마오쩌둥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 중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았다.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후원자이자 그 자신도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본인부터가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인이자 부유한 자본가였고, 그래서 가난한 마르크스를 경제적으로 많이 지원해주었다.] 홍위병들은 타국의 공산권 지도자들에게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김일성]]을 [[주체사상|수정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북한]] 접경지역인 [[만주|동북지방]]의 홍위병들이 이런 대자보를 붙이면서 반김일성 시위를 하면서 [[북중관계|중국-북한 관계]]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동시에 김일성은 이것을 외세의 압력이라고 간주하고,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주체사상]]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특히 마오쩌둥의 아버지를 부농이라며 비난하는 대자보는 마오로 하여금 홍위병들이 자칫하면 자신한테 반란을 일으킬 우려도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김일성을 비판하는 시위를 한것이 결국 북중관계에 악영향을 주었기에 홍위병들을 그냥 놔두다간 타 국가들과의 외교문제도 일으킬 판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68년]] [[7월 28일]] 공산당 지도부로 홍위병 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운동의 정지를 명했고, 68년에서 69년에 걸쳐서 [[상산하향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젊은 학생들은 농민에게 배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농촌으로 추방해버린 것으로, 시골로 한번 가면 도시 거주권을 박탈당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아야 하는 사실상의 [[토사구팽]]이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도 좋아서 따랐으나 곧 그들은 낙후된 중국 농촌의 현실에 짓눌리고 말았다. 수백만 홍위병들이 시골로 끌려갔는데 집도 없고 밥도 없고 질병과 해충과 폭력만 난무했고 [[강제노동]]에 항의하다가 농촌 지역의 군인들한테 [[부르주아]]랍시고 맞아죽는 경우가 빈번했다. 철모르는 소녀 홍위병들은 농촌에 도착한 순간부터 [[성범죄]] 피해자로 전락했다.[* 여성 홍위병들이 하방된 농촌에서 [[강간]] 등을 당하다가 도시로 귀환도 못 했다는 이야기는 80년대 말 일본이나 대만 경유로 한국에서도 알려지기까지 했다.] 몇명은 자신을 강간한 사람의 아이를 임신 출산하고 강제로 결혼까지 해야 했다. 당국은 강간과 [[강제결혼]]에 대해 '정상적인 성적 관계의 일부.'라고 규정했다. 당국에서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당연히 홍위병들을 시골에 처넣은 게 [[마오쩌둥]]이니 감히 마오쩌둥을 아무도 깔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이 조치는 홍위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역시 너무 지나치게 한 나머지 젊은 인재들이 모두 도시에서 빠져나가고 '학력붕괴'가 일어나서 무학자 세대가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중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또한 이 농촌의 현지인들은 숱하게 전쟁을 겪어 거친 자들이었으며, 거친 자들만이 살아남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농촌같이 [[닫힌 사회]]는 현재도 국가를 불문하고 범죄가 일어나더라도 주민들끼리 사건을 은폐해 버리거나 심지어 해당 지역의 경찰들도 한통속이라서 은폐시켜 주거나 아예 경찰들도 범죄에 함께 가담하는 등의 일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곤 하는데 이 당시 중국 농촌이면 과연 어땠을지는 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외에도 홍위병들이 악행을 밥먹듯이 저질러대서 당연히 홍위병들한테 원한을 품은 자들이 엄청 많았는데, 결국 홍위병들이 이렇게 힘을 잃자 그동안 홍위병들한테 원한을 품었던 자들이 [[사적제재]]인 보복을 가하는 상황까지 왔고,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홍위병이었음을 들켜 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이때부터 철저히 과거를 숨긴 채 살게 되었다. 홍위병들이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 저지른 악행들 때문에 힘을 잃자마자 보복을 당한 것은 물리적인 힘에서건 권력에서건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해서 약자들한테 원한 살짓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강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약자들한테 원한 살 짓을 하다간 이렇게 더 이상 강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보복 당하기 마련이며, 약자들 입장에서도 상대가 더 이상 자신들한테 이전처럼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보복을 저지르기 마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