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준표/생애 (문단 편집) == 고시 공부 == 대학생 시절에는 [[사법시험]]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등록금 5만 6천 원 + 한 달 하숙비 1만 4천 원 외에는 아무런 돈도 받지 못해 앞으로 쓸 돈은 모두 홍판표가 알아서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5층 여관집에서 과외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숙 문화가 있던 이 당시에는 상경한 가난한 고학생들이 부잣집 자녀들의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다가 눈 맞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다만 [[결혼]]까지 가는 경우는 극소수였고, 그 소수 조차도 상대가 여학생이라 [[임신]] 등의 피치 못할 사정이 많았었다. 그 반대인 경우는 [[꽃뱀]] 소리 들으며 바로 쫓겨났듯이, 잘못되면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고 그 동네 과외는 꿈도 못꾸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다.] 대학 생활 4년 중 [[고연전]]조차 딱 한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고려대학교]] 동기로는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경찰)|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승재(경찰)|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1952)|김성곤]] [[국회사무총장]], [[박계동]] 국회사무총장, [[송하진]] [[전라북도지사]] 등이 있다. 그가 대학생 시절 기거하던 [[종암동]]의 [[https://www.joongang.co.kr/article/5836448|하숙집 동기]]들도 유명하다.[* 이때 만났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이 바로 [[김태형(1967)|김태형]] 해설위원이다. 나이차는 좀 났지만 홍준표가 순대도 사주는 등 친밀하게 지내 호형호제하는 친한 사이였다. 김태형이 선수였을 때 팬이기도 했고, 홍준표가 훗날 [[대구광역시장]]이 된 후 개인적인 바람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김태형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당시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지척인 현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때여서, 하숙집 동기들이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상대생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같이 친하게 지낸 이들이 [[박재완]] 전 [[기재부장관]](서울대학교 경제학과 73학번),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서울대학교 무역학과 72학번), 서충일 전 STX [[팬오션]] 부사장, [[정해문]] 전 주태대사 등이었다.[* 홍준표는 이후 고시 준비와 검사 생활에 바빠 이후 30년 가까이 지난 [[2000년대]] 초가 되어서야 이들과 재회했다고 하는데, 동기들이 그를 처음에 잘 못 알아본 이유 중 하나가 재학 시절에는 개명하기 이전의 이름 홍판표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대구]]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광역시|울산시]]로 이사 갔다. 경상남도 울산시 중구 복산동(현재 [[울산광역시]] [[중구(울산광역시)|중구]] [[복산동(울산)|복산동]])으로 울산이 당시 막 공업지역이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 때라 홍판표의 가족들 역시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이주한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 24,000원의 월급에도 못미치는 박봉. 현재 가치로 40만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다. 당시 공장노동자 월급이 8만원(130만원) 정도였다고.]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왜 경비원이 순찰은 안하고 바닷가에서 모닥불 쬐고 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현대 조선소에는 담이 없고 철조망만 대충 쳐놔서 잔뜩 쌓아둔 철근 등의 자재를 노리는 도둑들이 많았다고 한다. 홍판표 부친의 일은 밤새 칼바람이 부는 백사장에 앉아 자재들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다시금 결심했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서 근무하니 회사에서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고된 노동과 무리한 음주로 몸이 상해서인지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7033103094_3.jpg|width=200&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7033103094_9.jpg|width=200&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7033103094_1.jpg|width=200&height=26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7033103094_8.jpg|width=200&height=260]]}}} || 그 역시도 "세상이 디비졌으면..." 하는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3학년 때인 [[1974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대자보를 써서 선후배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처음으로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고, [[박정희]] [[유신정권]] 반대 학생운동을 하며 총학생회 지하유인물을 작성하다가 글씨체로 추적당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8시간 동안 엄청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2053264|문제적 인간, 홍준표]] 그러나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마지막 유언을 따라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시국 활동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 고시 공부를 하러 절에 들어가게 된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공부를 이어가던 도중 [[고려대학교]] 앞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에서 일하던 군산여상 출신의 20세(55년생)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게 반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역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 나와 앞으로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저 선배의 도움을 얻기 전까지 4개월 동안 은행 입출금 창구에 오갔다고 한다. 자기를 보고 매번 웃는 모습에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았다고... 사실 행원 업무상 고객한테 웃으며 응대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걸 호감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이순삼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월요일에 왔다고 말하면 부인이 자존심이 상해 수요일로 박박 우겼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마음에 여유가 생겨 그냥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와카남]]에서 보여주었다. 문제는 직후 하는 얘기가 "(은행) 퇴근하면 딱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였고, 홍준표는 "그러면 그냥 심심해서 왔다는 기가...? 라고 당황한다.] 홍판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전라북도]] [[부안군]]에 살고 있는 장인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리러 갔다. 대화를 나눈 후 홍준표는 다방으로 자리를 피하고 이순삼이 아버지 어머니와 셋이서 따로 더 이야기를 했다. 대화가 마무리된 후 다방으로 합류한 이순삼에게 "어떠셨대?"라고 묻자 이순삼은 솔직히 털어놨다.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아버지는 딸에게 "그거 구름잡는 놈이다. 택도 아닌 놈이다. 그런 놈이 고시 되면 [[이정현(정치인)|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한 반면, 어머니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라고 했다고. 때문에 용돈은 장모에게만 드리고, 장인은 용돈은커녕 26년간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집에 찾아온 적이 없지는 않다고 하니 이 말은 유세 중에 다소 과장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가끔 올 수 있도록 한 모양이다. 다만 장인이 와도 일부러 자리를 피해버리니 그 분위기는 정말로 집에 오지 마라고 하는 격이었을 것이다. 이를 넓은 의미에서 '발을 못 붙이게 하다'라고 한 듯하다.] 장서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장모에게는 '장인 영감이랑 용돈 나눠 쓰면 다음부턴 장모도 안 드린다.' 라고 말했다. 물론 장모 앞에서 농담식으로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응어리가 많이 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 장인이 딸을 만나러 집에 온다고 해도 홍준표는 장인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일부러 자리를 피했고, 그 사이에 끼어서 이순삼 여사가 가슴앓이를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에는 홍준표가 장인을 모시고 병 수발도 하고, 임종까지 지켰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장인이 "옛날에 잘못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라고 사과하자, 이에 홍준표는 "잘못한 줄 이제 알았습니까. 편하게 가십시오." 라고 하면서 응어리를 풀었다. 사실, 홍준표가 장인과 갈등이 심했던 것은 비단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홍준표의 어머니 역시 자신의 귀한 아들을 사시 못 붙은 한량이라고 괄시한 바깥사돈에 매우 분노했고, 홍준표가 어머니에게 장인어른을 용서해달라고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별세하기 직전까지도 바깥사돈을 끝내 용서하지를 않았다. 어머니가 용서하지 않은 장인을 아들 홍준표로서도 용서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동서도 "20년이다. 살인죄도 15년이면 공소시효 끝나는데[* 당시에는 살인죄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때였다.] 아직도 그러나..."라고 유감을 표했으나 홍준표는 "어머니께서도 용서하시지 못한 장인을 아들로서 용서하기가 어렵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깥사돈이 홍준표를 반대한 것처럼 홍준표의 어머니도 역시 명문대 법대생 아들과 달리 며느리 [[이순삼]]이 상고밖에 못 나온 것이 눈에 차지 않아서 며느리를 반대해서 결혼 과정이 순탄치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는 대학 진학률이 지금보다 더 낮아서 여자는 고졸에 은행원만 돼도 충분히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시절이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마흔둥이 귀한 아들을 힘들게 고생하고 빚져가면서 법대, 그것도 그냥 법대가 아니라 명문대 법대를 보낸 어머니인지라 아들에 대한 강한 자부심, 그리고 당신은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라는 자부심이 정말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순삼이 전라도 출신 여자인데다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이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하면 심했고 덜하지는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영호남 출신 부모들끼리 결혼을 반대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정말 얼마 안 가서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다. [[신혼여행]]은 [[아산시|아산]] [[도고온천(아산)|도고온천]]으로 갔는데, 고급 [[호텔]]에 처음 들어간 신혼부부는 새벽 1시가 되도록 이불도 없이 히터도 되지 않는 방에서 덜덜 떨었다고 한다. 화가 나서 프런트에 항의하자, "경대 앞 버튼을 누르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난 삼아 눌렀던 버튼이 히터 차단 버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보충역 판정을 받고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부끄러웠던 그는 처가가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제105보병여단|해안초소]]에서 [[방위병|복무하였다]].[* 훗날 홍준표는 회고하기를, 현역으로 복무하고 싶었지만 여자친구(이순삼 여사)와 떨어지는 것도 싫고 고시 공부를 중단하기도 부담스러워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현실과 타협해 출퇴근하면서 고시 공부를 병행했다고 한다.] 그렇게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철강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사법시험에 대한 미련이 남아 퇴사를 하고 다시 도전했는데, 결국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30세, 호적상으로는 29세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오랜 낙방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기대하지 않았던 마지막 시험에서 합격했는데 마지막 시험도 당연히 불합격인 줄 알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취직을 알아보고 있었고 그게 잘 여의치 않았었는데, 시험 합격 발표일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했던 거라고 한다. 같이 합격한 [[사법연수원]] 동기(14기)생으로는 [[추미애]], [[주호영]], [[신기남]], [[정종섭]], [[권순일]], [[이기택(법조인)|이기택]], [[이석태]], [[채동욱]], [[김진태(1952)|김진태]]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