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역사 (문단 편집) == 영국 지배 이전 == 홍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의 거주 흔적은 2003년에 신계 지역 동남부에 위치한 [[사이쿵구]]에서 발견된 35000~39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현재의 [[홍콩인]]/[[마카오인]]을 포함한 [[광동인]]은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원래 이 지역에 살던 민족은 백월로 칭해지는데 이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다이카타이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동남아시아]] 계통의 종족들이 터 잡고 살고 있었고 이를 중국에서는 월(粤)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광동어의 이명(異名)은 월어(粤語)라고 불린다.[* 참고로 월어(粤語)는 광동어의 또 다른 이름이며 [[캐세이퍼시픽]] 승무원들은 구사 가능 언어를 명찰에 써 놓는데 기본이 英(영어)/粤(광동어)이고 [[표준중국어]]가 가능하면 國語도 표기한다. 그 외 비중국계 외국인 승무원들은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아랍어, 힌디/우르두어 등 각자 모국어를 표기한다.] 홍콩의 기원지인 [[광동성]] 일대는 고대에 월(越/粤) 내진 남월(南越) 지방이라고 했는데 [[월나라]]보다 남쪽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들은 [[진나라]] 및 [[한나라]] 등 [[한족]] [[왕조]]의 정복으로 인해 복속되고 전란을 피해 [[중국 대륙]] 중북부의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섞여 들어와서 한족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DNA도 [[홍콩인]]이나 [[광둥성]], [[광시좡족자치구]], [[하이난성]] 쪽의 한족은 [[중원]]이나 화북 지방의 한족보단 오히려 [[베트남인]], [[태국인]]과 유사하다.[* [[베이징]] 등 화북이나 둥베이 지방의 한족들도 중원과는 DNA 차이가 꽤 다르고 오히려 [[몽골인]] 및 [[만주족]]과 더 비슷해서 한족 집단 내부의 DNA 차이가 크다. [[한족]] 문서 참고. 민족 결정에 혈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는 [[아랍인]]이나 [[유대인]]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랍인과 유대인도 '''언어'''로 민족을 정했으며 각자 인종이 각기 달라서 시리아, 레바논 등의 백인계 아랍인과 오리지널에 가까운 아라비아 반도의 갈색 인종 아랍인, 흑인 혈통의 [[수단 공화국|수단]], [[차드]], [[모리타니]] 등 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존재하고 유대인도 백인계 아슈케나짐과 오리지널에 가까운 갈색인 세파르딤, [[우즈베키스탄]]이나 [[중국]] 북부 등에 거주하는 황인 아랍인 등이 모두 존재한다.] 역사 시대에는 [[진시황]]에게 병합되었다가 진시황 사후 이 곳에 파견되었던 임효와 그의 부관이었던 조타[* [[베트남어]]로는 찌에우다로 불린다.]가 [[광저우]]를 수도로 [[남월]]을 건국했다. 남월은 남쪽 월나라라는 뜻이다. [[남월]]은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하이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일부와 [[베트남]] 북부를 아울렀으나 [[전한]] 시대 [[한무제|무제]]에게 정복당해 이후 [[중국]]의 영역에 들어가고 한족화된다. 중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 영국령이 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둥관시]] 및 [[선전시]]와 지역사를 공유한다. [[동진]] 시기인 331년에 현재의 [[둥관시]]의 전신이 되는 보안현(寶安縣)이 설치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었다. 이후 [[당(통일왕조)|당나라]], [[송나라]]와 [[원나라]] 대에는 동관현(東莞縣, 757년에 보안현에서 개칭)의 관할 구역에 속하였으며, 무역항과 해군 기지로서 활용되었다. [[송나라]]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가 이 근처에서였고 여기서 [[원나라]]에 패배한[* 이 때 해군이 없던 몽골족들이 처음에 고전했으나 범문호 등 남송 출신 한족들이 원나라에 귀부, 원도 수군을 갖추어 전세를 뒤집는다.] 조씨 황족들은 전부 [[구룡반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원나라는 [[대만]]을 공략하고 [[베트남]]과 [[미얀마]]를 정벌하는 기지로 사용했다. 물론 베트남 원정과 미얀마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때 홍콩은 광저우의 몽골만호부가 관할해 수비군이 주둔했으나 대게 한족들이 알아서 자치를 하는 곳이었고 몽골족 관리는 없었다.[* 원의 직접 통치 영역은 화북 지방으로 화북 한족들은 [[변발]]을 강요당하고 감시를 받았으나 강남은 한족 신사층의 자치 지역이 되어 알아서들 했고 머리도 밀리지 않았다.] 이후 [[명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의 양광지방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 홍콩 연안엔 [[왜구]]가 기승이었다. 왜구들은 대만을 기지 삼아서 광동성과 푸젠성 연안을 약탈하는가 하면 베트남 북부까지 약탈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게 이 시기다. [[포르투갈인]]들은 홍콩 북쪽 [[신계(홍콩)|신계]] 연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명나라 수군에 포로가 되어버렸고[* 명은 강력한 천자의 조정과 화약무기인 화창, 삼안총 등으로 무장한 강력한 수군이 존재하여 [[콘키스타도르]] 한두명이 무쌍 찍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문명이 꽤 발달했으나 유럽보단 좀 뒤쳐졌던 [[인도]] 및 [[페르시아]]와는 달랐다. 말라카만 해도 꽤 문명이 발달했으나 유럽보단 뒤쳐져서 포르투갈인들이 소수 병력으로 점령했다.] 이때 명은 [[마카오]]를 떼 주며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살게 허락해 주는 한편 그 반대급부로 유럽식 화약무기를 받아들여서 [[조총]]이 아시아에 최초로 소개되고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소개되었다. [[1573년]]에 지금은 [[선전시]]가 된 신안현(新安縣)이 둥관현에서 분리 신설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어 [[난징 조약]] 전까지 신안현의 일부였다. 명이 망한 뒤 [[남명]]이 잠깐 들어섰다가 [[강희제]]의 친정으로 남명이 망하면서 완전하게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청은 여기에 주방 [[팔기군]]을 주둔시키고 치발령으로 한족 남성들의 머리를 모두 깔끔하게 [[변발]]로 밀었다. 한족 여성들도 알아서들 여진식 복장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원과 청 둘다 북방 계통의 정복왕조라 자신들의 고향인 [[내몽골]], [[만주]]나 수도인 [[베이징]], [[강남(중국)|강남]]의 중심지 [[항저우]]와도 멀리 떨어졌고 가까운 곳에 [[광저우]]가 있기때문에 이 당시 홍콩은 광저우의 배후지 정도의 취급이었다. 물론 청은 더 철저히 이 지역을 직접 다스려서 [[팔기군]]을 광저우를 기지로 박아놓고 [[변발]]도 강요했다. 이따금 일어나는 저항은 주방 팔기군이 모두 무자비하게 진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