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역사 (문단 편집) === 영국의 홍콩 점령 === [[1513년]]에 [[포르투갈인]] 호르헤 알바레스(Jorge Álvares)가 [[서양인]]으로써 최초로 [[홍콩]]에 상륙한다. 물론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조차하자 그 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광저우의 공행을 통하여 [[유럽]]과의 접촉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광둥성]] 근처 도시에 무역항을 건설하면서 처음으로 홍콩과 [[영국]]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1841년]], [[제1차 아편전쟁]] 때 [[홍콩 섬]]은 [[영국 해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홍콩 섬]] 센트럴엔 영국 해병대가 상륙하여 영국 국기가 게양된다. 그리고 다음해의 [[난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이듬 해에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의 건립과 함께 총독부를 신설하였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지금 대황제(大皇帝: 청 황제)가 장차 [[홍콩]] 한 [[섬]]을 대영국 군주에게 급여하니, 사후 왕위를 세습하는 자가 항상 __'''영원히'''__ 장악하고 편의에 따라 법도를 세워 다스리도록 맡긴다. > >중국 황제 폐하는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에게 [[홍콩]] 제도를 양도한다. 홍콩 제도는 __'''영원토록'''__ 대영의 여왕, 그 상속자와 후계자의 소유가 될 것이며,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가 직접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법률과 규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이다. >---- > 《[[난징 조약]]》 제3조, [[한문]]과 [[영문]]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Hong_Kong_in_First_Convention_of_Peking_in_1860.jpg]] [[파일:external/i0.wp.com/Zolima_Boundary.jpg|w=740]] [[1860년]] 영국으로 할양되어 영구 귀속된 영역. 현재의 모습을 보면 갯벌을 죄다 간척해버린 육지의 확장으로 해안선에 많은 변화가 있다. 이때 삼수이포와 몽콕 쪽은 바닷가였으나 간척으로 내륙으로 쑥 들어갔다.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터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한 이후 [[베이징]]까지 털리면서 체결한 베이징 조약을 통해 추가로 영토를 할양해 홍콩의 범위가 확장되는데 바운더리 스트리트(Boundary Street, 限界街)의 남쪽 [[구룡반도]] 남단[* 현재의 야우침몽 구로 침사추이, 야우마테이, 몽콕 일대다]과 스톤커터스 아일랜드(石環島)가[* 현재는 간척으로 육지로 연담화되어 사라졌다.] [[베이징 조약]]으로 영속적으로 [[영국]]에 추가 귀속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The_Convention_for_the_Extension_of_Hong_Kong_Territory_in_1898_-_1.jpg]] [[1898년]] 추가 조차되어 편입된 지역으로 청나라 신안현을 신계로 편입해버려 홍콩 면적이 넓어졌다. 현재의 [[지도]]와 거의 같다. [[파일:Map_of_Hong_Kong.svg|width=700]] 홍콩 지도다. * [[1842년]] 귀속된 곳은 초록색이다. * [[1860년]] 귀속된 곳은 지도 14번을 포함해 바운더리 스트리트 남쪽 구역이다. * [[1898년]] 10~13번과 [[신계(홍콩)|신계]]가 추가 할양되었다. [[1898년]]에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산까이(新界, 신계)를 당시 충분히 영구 양도받을 수 있었음에도 99년간 조차했는데 유효 기간은 [[1997년]]까지였다. 여기서 왜 굳이 영구할양도 아닌 99년 조차인가에 대하여는 당시 서구 다른 열강들이 영국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강해지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를 의식해서 99년 조차로 청나라 관리와 합의했다는 설과 영국이 오만하게 청나라가 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조차로 시작해 슬그머니 영구 강점하는 계략이었는데 [[신해혁명]]으로 일이 꼬여버렸다는 등이 있다. 후자는 좀 들이맞는 게 실제로 영국은 바운더리 스트리트 이북인 카이탁에 공항을 만들고 삼수이포와 쿤통, 그리고 샤틴/췬완/콰이충 등 신계 남부를 신구룡(新九龍)으로 부르며 도심용 빨간 택시를 집어넣고 나머지 신계와 다르게 취급한 것 등이 있다. 신계 대부분을 약속대로 99년 조차 만료 후 중국에 돌려줘도 신구룡만은 잃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99년 조차 조항은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의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써 활용되는 자유 무역항으로 선언되었고 [[구룡반도]]에서 [[광둥성]] 곳곳으로 운행하는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화가 꽃핀 지역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