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헌제제 (문단 편집) === 여론 조작 === 1915년 8월, 위안스카이의 미국인 정치고문 프랭크 J. 굿나우(Frank Johnson Goodnow)[*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찬성한 것 때문에 개듣보 학자가 헛소리한것 정도로 폄하받는 일도 있는데 법학, 행정학에서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존스 홉킨스 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미국 정부에서 일한 인물이다.]가 베이징의 신문인 <아시아일보>에 <공화와 군주론>이란 글을 발표하여 중국에는 공화제가 부적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인 법률 고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도 동조했다. || [[파일:프랭크굿나우.jpg|width=100%]] || [[파일:아리가나가오.jpg|width=100%]] || || 프랭크 굿나우 || 아리가 나가오 || 8월 14일에는 소위 주안 6군자라 불리는 양탁, 손육군, 엄복, 유사배, 호영, 이섭화 등이 주안회 선언을 발표하여 군주제를 주장했다. ||[[신해혁명]] 당시 국민들은 감정에 사로잡혀 국정을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공화국을 세웠다. 중화민국 건립 이후 나라는 많은 위험을 겪어왔고 국민은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 정치학자 굿나우 박사도 군주제는 공화제에 비해 우수하므로 중국은 군주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 국민은 눈앞의 일만 보고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 나라 밖의 사람들도 우리 나라에 관심있는 사람은 큰 소리로 우리를 위하여 질책하고 충고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나라 사람은 반대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 그러면서도 장차 애국이라 말하겠는가.|| 이들은 신해혁명 폭발 이후 창황하게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은 공화제를 제정하여 혼란만 있다고 지적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를 사례로 들며 공화정이 들어서면 당쟁, 전화가 끊이지 않으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 개혁이라는 당연히 제정을 복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맞춰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들이 민의에 따라 국체를 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다만 주안회의 주장이 청나라 시대의 전제군주제를 복고하자는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라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기는 하였다. ||본회가 국가를 위하여 도모하여야 할 일은 먼저 혼란을 정리한 이후에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므로 먼저 혼란을 정리하는 길은 민주를 폐지하고 군주를 회복하는 것이며 잘 다스리려면 민주 전제를 페지하고 군주 입헌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본회가 토론한 결과이다.|| 이런 제제 여론은 위안스카이의 어용 세력이었으므로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량치치오가 <이상하도다, 국체문제여>라는 글을 발표해 군헌구국론을 반박했고 "소위 청원자들은 모두 원씨 스스로가 청원하는 것이고 (...) 소위 옹립하려는 자들도 원씨 스스로 옹립하는 것이다."라고 제제 운동에 대해 싸늘하게 비평했다. 장사교는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나이 든 관리는 물러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신문 언론은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제제를 주장하는 언론을 비판했고 왕봉영, 서불소 등도 주안회에 편지를 보내 주안회의 주장을 비판했다. [[쉬스창]]이나 [[캉유웨이]]를 비롯한 복벽파들도 [[선통제]]의 복위를 주장하면서 위안스카이의 제제 운동을 비판했다. 심지어 주안회가 위안스카이의 복벽 운동 징치령을 어겼다고 고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제 운동을 옹호했다. 주안회는 공민청원단을 조직하는 한편 9월 2일 참정원에 청원서를 올려 국체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9월 6일 양사기를 파견하여 입장을 밝혔다. >"군주제로 바꾼다는 것은 총통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국민의 청원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다수 국민의 의견을 들어본다면 타당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위안커딩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했던 일이 바로 일본 외무성이 톈진에서 발행하던 <순천시보>를 위조하여 아버지에게 갖다바친 일이었다. 이를 보고 위안스카이는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지지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위안스카이 문서나 호국전쟁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신문을 조작했단게 들킨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에게 채찍으로 두들겨맞고 신임을 잃게 된다.] 위안커딩의 만행은 이로 끝나지 않아서 위안스카이가 평소에 존경하던 학자 엄수[* 주안회는 엄수에게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주안회 선언에 엄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일을 한 바가 있다.]가 주안회의 군주제 주장은 백해무익하다고 만류하고 주안회가 위안스카이를 속이고 있다고 충언하자 위안커딩은 지팡이를 휘둘러 창문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버리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사람들이 위안커딩이 엄수를 해치려 한다고 귀뜸해주자 놀란 엄수는 톈진으로 돌아가 다시는 위안스카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또한 위안커딩은 당재례가 위안스카이에게 요임금과 순임금이 아들이 아니라 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말을 하자 그를 쫓아내기도 했다. 이어 주안회는 이름을 헌법협진회로 고치고 9월 16일 참정원에 2차 청원서를 보내는 한편 9월 19일 전국청원연합회를 조직하여 심운패를 회장으로 삼고 나언도, 장진방을 부회장으로 삼고 수많은 청원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공화 정치를 유지하여 나간다는 것은 중국의 역사와 나라의 사정에 적합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정치적인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양탁도 경쟁적으로 각종 청원단을 만들어 경사상회 청원단, 상무총회 청원단, 교육회 청원단, 부녀 청원단, 거지대표 청원단(...), 인력거 청원단, 기생 청원단까지 조직하여 모든 인심이 군주제를 요구하는 것처럼 위안스카이를 부추겼다. ||이렇게 된 이래 22개의 성과 특별 행정구의 각 단체들은 원로들을 추천하여 동인회를 결성하자고 공동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그 호소문이 수만 언에 다다르고 참여한 사람도 수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군헌 두 글자 뿐이다.|| 봉천순열사로 파견된 돤즈구이도 각성 장군, 도통, 호군사들을 연합해 황제 즉위를 청하고 참정원에 계속 체제 개혁을 요구했다. 이에 참정원은 9월 17일, 1915년이 지나기 전에 국민회의를 소집하거나 별도 대책을 세울 것을 결의했고 위안스카이는 11월 20일 이전에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국체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전국청원연합회는 3차 청원서를 바쳐 국민회의 소집을 반대하고 별도 기관을 통해 국체를 정하자고 했다. 참정원은 민의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국민회의 대신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겠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