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교 (문단 편집) === [[북한]] === 북한의 경우 [[김일성]] 집권 당시 [[갑산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을 제거하였으며, 그 와중에 화교를 도울 수 있는 중국계 세력인 [[연안파]]도 쓸려나갔다. [[대장정]] 참가자이며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장성 출신이던 [[김무정|무정]]마저 [[6.25 전쟁]]의 책임을 구실 삼아 실각하였다. 대장정 생존자들은 [[중국]]에서도 영웅 대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서 [[김일성]]이 [[김무정|무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고도 한다.] 김일성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에 대해 알 수 있다. 게다가 후에는 [[주체사상]]의 확립 등으로 인하여 실제 [[중국인]]이나 중국 세력이 힘을 뻗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북한군]]은 화교와 재북 [[일본인]][* 대부분이 [[납북 일본인]]이나 북송된 [[재일 한국인]]의 배우자들의 후손이며, 극소수 월북한 [[공산주의]] 성향 [[일본인]]도 있었다. 다만, [[8월 종파사건]] 이후로 [[북한]]이 무늬만 공산주의인 나라가 되면서 새로 월북하는 사람이 없어진 탓에, 대부분이 북한 사회에 동화되었다.]도 입대시킨다. 다만 근무하는 부대에 제한이 있다. 고위 간부와 친분을 맺은 일부 화교는 김일성 사망 직후 [[압록강]]을 넘어 중국과 북한의 무역에 참여했다. 만주 일대에 머물면서 북한에 남은 친척을 통해 대북 거래를 하는 등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신의주와 나진 선봉 경제특구에도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고, 지금도 만주 일대에서 대북 무역을 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북한 화교는 한국보다 많은 5만명 수준이었으나 전쟁통에 자본주의자들은 [[월남]]하고 일부는 중국이나 대만으로 갔다. 전쟁 직후엔 1만까지 줄었으나 중국에서 [[대약진 운동]]실패와 [[문화대혁명]]등 사고가 터지자 중국에 있던 화교의 친족 등이 입국하면서 2만 5천명까지 늘었다. 90년대 초반 동유럽과 소련이 차례로 붕괴 되면서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거지가 된 북한이지만 당시엔 소련의 지원 등으로 생활 수준이 중국보다 괜찮았다. 79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및 화교에 대한 귀국지원정책과 더블어 90년대 중반 북한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역전되면서 많은 화교들이 중국으로 되돌아가서 현재는 약 5000명 정도가 남아 있다. 2009년 기준이라 더 줄었는지 아니면 보따리 장수 등으로 더 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 비해 너무 낙후한 북한의 경제사정과 화교를 돈주머니 쯤으로 여기는 북한 현지 관료들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화교들은 아버지 세대와 달리 중국에서 거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요식업에 종사한 한국 화교와 달리 북한 화교들은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한다. 이는 주로 이 화교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에 농토를 받은 탓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재북 화교들은 당연히 북한 내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일례로 북한의 공민증에는 '민족'란이 있는데 이는 주로 화교를 가려내기 위한 것. 또한 북한은 순혈주의를 강조하면서 매우 배타적인 국가인데 화교, [[재일교포]], [[조선족]], 남한 출신 월북자도 민족간부([[김일성고급당학교]]를 졸업한 리당비서 이상의 간부들)가 될 수 없게 못 박아 놓았다. 단, 성적 수석이나 고위급 당 간부와 친분이 있을 경우 소수지만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입학이 가능했다. 조선족 연고자와 결혼한 북한 토박이도 민족간부는 못 된다. 그래서 안그래도 정치 중심 사회인 북한에서 당 간부로 진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생활에서 많은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데.... 이때문에 몇몇 북한 화교는 북한에 대한 불만이 커서 '''순수한 북한 주민처럼 탈북을 시도했다가''' 남한 정부에 걸려 중국 국적을 가진 이들을 강제출국시키기도 하는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당사자인 [[유우성]]도 이런 케이스다. 몇몇 화교들은 북한에서 보내는 편지를 외지로 몰래 전해주다가 들통나서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한편, 최근에는 탈북 여성이 데리고 오는 중국 국적의 자녀가 여러모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들 탈북 여성을 [[화냥녀]] 취급하며 중국인 남자 사이에서 낳은 [[혼혈]]을 [[북한/이념|이념]]에 의거하여 [[북한/인권|피가 더럽혀졌다고 차별한다.]] 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 팔려가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조선족 혹은 한족 남성 사이에 낳은 자녀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고자 중국 호구를 돈으로 구입하는데, 법적으로 중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중국 호구를 취득한 탈북민과 중국인 사이의 한중혼혈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가 중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 국적이 일단 상실된 사람으로 규정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국적회복]]을 허가하고 있다. 다만 이것은 초반에만 문제가 되었을 뿐 현재는 [[국적회복]] 제도를 이용해서 큰 문제없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중국호구를 취득하지 않은 혼혈아는 한국으로 오면 헌법상 원래부터 한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보아서 한국 국적을 부여하지만, 북한에서 태어났거나 북한에서 산 적은 없으므로 북한이탈주민의 혜택은 받지 못한다. 현재는 이런 중국계 혼혈 탈북청소년이 북한 출신 탈북 청소년의 수를 넘어서고 있다. 당연히 북한에서도 [[http://www.goodfriends.or.kr/n_korea/n_korea0_2.html?sm=v&p_no=8&b_no=12765&page=1&year=2012&num=439|잘나가는 화교들은 잘먹고 잘 산다]]. 물론 그정도 김일성 대학까지 들어갈 수준의 북한 화교들은 대부분 탈북을 하겠지만(...) 특히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경제가 파탄나고 소비생활을 거의 전적으로 중국산 수입품에 의존하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심각해졌다. 당장 북한 시장화의 서막을 연 자금 조달처는 여지없이 중국이다. 주로 화교자금과 조선족자금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건수로 따지면 후자가 우세하긴 하다. 또 중국과의 보따리 무역의 상당수는 북한 화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일례로 북한과 중국 국경 연선에 있는 모 군의 경우 단 한 가정의 화교가 있는데 이 화교 부부가 군 전체에 들어오는 농자재의 절반 정도를 충당한다고 한다. 물론 지역 관청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강을 넘는 조선족 연고자나 돈 많은 장사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부의 경우 두 사람 모두 화교다 보니 '''번갈아가며''' 강을 넘어다닐 수 있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밀수품도 많이 들여오는 듯 하다. [[청진]] 등지에 화교학교도 남아있다고 한다. 청진화교학교는 [[저우언라이]]가 설립했는데 [[대만]] 교재를 쓰는 한국의 화교학교들과는 달리 북한 교재를 쓴다고 한다. 주로 신의주 등지에 화교 보따리 장수가 많다고 한다. 또, 중국을 드나드는 화교들에게 급행 비자를 강제로 발급해 고액의 수수료를 챙기고 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813417|#]] 중국 국적의 북한 화교가 중국으로 가서 살다가 '''6개월''' 이내 북한으로 들어오면 다시 북한에 거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에도 [[화교학교]]가 있다. 북한 화교들이 남한으로 와서 거주 의사를 밝힐 경우에는 국정원 심사를 통과하면 [[한국]] [[국적]]을 받고 한국에 거주할 수 있다. 과거에는 중국 국적이기 때문에 [[탈북민]]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무국적자]] 대우를 받았으나[* 북한 화교들은 중국 국적이지만 중국에 [[호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 대사관에서 한국 정부에게 이들의 신원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변한다고 한다. 즉 깡통 국적, 깡통 여권인 셈이다.] 이후 인도적 차원에서 탈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와 일반 탈북민과 같은 탈북행 루트를 거친 경우에 한하여 받아주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만갑]]과 [[배나TV]]에 출연한 북한 화교 3세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 와서 국정원을 나온 후에 신분증([[한국]] [[국적]])은 받았지만 다른 탈북민처럼 임대아파트 우선권, 정착금 같은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원래 중국 국적이었다가 한국 국적을 준 것이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