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일제 강점기 ===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병합한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 사실 1920년대 이전에는 일본 상인들의 주요 교역 물품 또한 동일했다. 영국산 면제품을 중계무역하는 것이 중국상인, 일본상인 등 외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제 무역에서 일본산 생사와 면제품 비중이 급격히 높아져서 오히려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상황이 된다.]이나 자국의 [[비단]] 등인데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 일본의 그러한 관세정책은 일본 본토에서 급성장한 방직, 방적 산업을 보호하고 조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으로 이를 견제한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갓 2000만 정도를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공식 통계론 당시 화교의 인구가 9만에 달했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쌌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외국에 돈을 벌러 왔다는 심리적 이유로 인해 조선인보다 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상 일본인 경영자들이 조선인보다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하였다. 이때문에 조선인들한테서 중국인들은 조선인의 일자리를 뺏으면서 조선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졌고,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내에서 반중바람이 거세게 불면 독립운동가들의 입지가 급속도록 좁아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당시에 조차지였기는 했지만 어쨌든 중국 안에 위치해있었다.)에 위치한데다가 독립운동가들도 [[중국 국민당]]이나 [[중국 공산당]] 등 중국 내의 정당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노린것이다.] 반중감정이 거세지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감소될수있다는 측면으로 인해 일부러 이를 조장한다. 특히 조선인들과 화교간의 갈등이나 언론을 통한 조선인-화교 대결구도 강조와 유언비어 유포를 부채질하였고, 여러번 오보사태가 터지며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까지 화교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난다.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 [[1927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화교배척폭동]], [[1931년 평양화교 학살]] 문서 참고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평양 한 곳에서만도 약 12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 이 폭동으로 약 4천명의 화교들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난다. 다행히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된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한국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때 한국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의 무역이 불가능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