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궈펑 (문단 편집) == 개요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국무원 총리]]로 [[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 그러나 결국 생전 마오쩌둥의 뜻[*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얻기 어려운 인재라며 높이 평가했고 오랫 동안 (류사오치 뒤를 이을) 자신의 차차기 후계자로 고려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조정 국면에서 점점 류사오치와 뜻을 같이 하며 마오와 사이가 멀어졌다. 훗날 마오는 이 무렵 몇 년간 덩샤오핑이 자신을 겉으로는 섬기는 듯 하면서도 실제 구체적 업무에서는 배제했다며 '죽은 조상 섬기 듯 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태도는 마오의 미움을 샀고, 결국 문혁이 일어나자 덩은 류사오치와 함께 '당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 1호와 2호로 몰려 함께 실각했다. 하지만 마오는 아예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 류사오치와 달리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과오도 많지만 공이 더 크고, 그 과오도 차차 고쳐나갈 수 있는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고 평가했다. 마침내 린뱌오 사망 이후 마오는 덩을 다시 불러들여 당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요직에 기용한다. 하지만 덩이 문혁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의 경제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던 마오는 여전히 흑묘백묘를 이야기 하고 다닌다면서 덩샤오핑은 영원히 복권시킬 수 없다며 다시 실각시켰다. 덩샤오핑 전에 후계자로 생각했던 사인방의 일원인 왕훙원은 사상(문혁에 대한 지지)은 믿을만하지만 능력이 부족하고 덩은 능력은 좋지만 사상이 부족하다고 평가했고 결국 화궈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지한다.]과 달리 1978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당 고위직에 머물긴 하지만 [[권력]]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