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궈펑 (문단 편집) === 중국의 전반적인 평가 === 화궈펑은 중국 현대사의 두 거인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사이에 끼어 있는 [[윤보선|거의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오쩌둥에게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국정을 어지럽힌 4인방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등 나름대로의 정치적 역랑을 보여주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서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능력과 존재감은 화궈펑이 이기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그의 대표적 실책으로 꼽히는 문혁의 온건한 철회도 화궈펑이 자리를 잃을 만큼 시대의 흐름에 완전히 어긋났다고 보기 어려운 게, 4인방을 제거한 뒤의 그라면 인민들이 적당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낼 가능성은 충분했다. 화궈펑은 자신의 정당성 확보 목적으로 문혁을 형식적으로 옹호했을 뿐 사회 전체를 다시 문혁 분위기로 만들 마음은 아주 조금도 없었다. 또 거의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덩샤오핑을 다시 중앙 정계로 불러들여 기용했고 그의 개혁안을 상당히 받아들여 그가 성과를 내는 것을 허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마냥 보수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남의 아래 머무는 것에 만족할 사람도 아니었고, 화궈펑에게는 덩샤오핑을 제어할 만한 정치력이 없었다. 이 때문인지 화궈펑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해 덩샤오핑과 권력 투쟁을 벌이지 않았고,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선양]](?)을 했으며 이 때문에 덩샤오핑에 의해 예우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당국의 공식적인 역사평가에서는 전환기에 급격한 정책으로 나라를 혼란으로 빠뜨리지 않고 온건한 변화를 이끌어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역시 집권 4년은 (1976-1980) 신중국 창립후 가장 단명한 지도자이다. [[뤼순감옥]]에 전시된 역대 중국 지도자 초상화에도 화궈펑은 나와있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