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궈펑 (문단 편집) === 정가 입문 === 1921년 [[산서성]] 교성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쑤주(苏铸, Sū Zhù; 소주)이며, 화궈펑(화국봉)이란 이름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화'''구'''국'''선'''봉'''대(中'''華'''救'''國'''先'''鋒'''隊)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가명이다.[* 그래서 자녀들은 모두 화씨가 아니라 쑤씨(소씨)이다.] 고향에서 상업 학교에 재학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에 입당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국공내전]]에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하자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성 샹인현 당서기가 되었다. [[후난성]]에서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점점 직위가 상승했으며, 1958년에는 부성장까지 이르렀다.[* 화궈펑이 지방 당간부에 머물던 시기에, 덩샤오핑은 이미 건국 당시부터 런비스(1950년 과로사)와 함께 40대 차세대 기수로 꼽히고 있었다. 덩은 국공내전에서 이름을 날린 전국적 스타로 시작해, 서남국 서기와 부총리를 거쳐 56년에는 당 총서기에 올라 당무를 총괄하면서 전국 레벨에서 놀고 있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화궈펑은 군수, 덩샤오핑은 도지사가 출발점이고, 이후 덩샤오핑이 국무총리까지 가는 동안 화궈펑은 중앙과는 거리가 먼 도지사쯤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이후의 권력투쟁에서 경력과 권위에서 밀려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와 후난성 제1서기 저우샤오저우가 실각하자, 마오쩌둥을 열렬히 지지하면서 펑더화이를 비판하고, 펑더화이의 고향이기도 해서 펑의 입김이 셌던 후난성에서 펑더화이의 부하들을 몰아내면서, 마오쩌둥의 눈에 들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주창했다가 대실패를 한 [[대약진운동]] 직후인 1961년 마오쩌둥에게 인민의 몸무게가 줄고 있으며 가축들까지 굶주린다고 직언했는데 마오쩌둥은 진실을 말하는 것은 화궈펑 뿐이라며 그를 칭찬하며 신임했다. 마오쩌둥 노선의 열렬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열심히 문혁 정신(?)을 퍼뜨렸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고향 후배[* 원래 산서성 출신이지만, 중국 건국 후 후난성에서 20년간 살았기 때문에 후난성인으로 간주된 듯 하다.]였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면담할 때는 [[표준중국어]]가 아니라 후난 사투리로 말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경우 동향인인 펑더화이나 류사오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사투리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데 둘다 [[숙청]]~~] 하지만 문혁으로 마냥 탄탄대로를 겪은 것은 아니라서 1967년 5월에 조반파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서 감금되었다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겨우 풀려난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9.13 사건 이후 중앙 정계로 발탁되어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공안부장]], 그리고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