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궈펑 (문단 편집) ==== 양개범시 ==== > 兩個凡是(양개범시) - 무릇 마오주석의 결정은 반드시 옹호해야 하고, 무릇 마오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화궈펑은 사인방 실각후 위의 '''"양개범시"'''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물론 문혁 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화궈펑은 전형적으로 문혁, 넓게 잡아서 마오쩌둥의 폭주 덕분에 승진한 마오의 수혜자로, 문혁 청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궈펑의 당정의 지도자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의 상급자인 저우샤오저우가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몰락한 일이었으며, 화궈펑은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하면서 급부상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원래 경위국에서 일하며 마오쩌둥을 보좌한 왕둥싱, 지덩쿠이, 우더, 리신 등이었다. 따라서 화궈펑은 문혁 청산에 매우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마오쩌둥 흉내를 내면서 당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당내에는 화궈펑보다 경력이 화려하고 카리스마가 대단한 원로들이 줄줄히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먹힐리 없었다. 당시 신화적인 [[대장정]]에 참가한 당원로만 해도 당내에 수십명이 살아 있었다. 화궈펑은 대장정 참가는 커녕 당시 중학생이었고, 대장정이 끝난 4년후인 1938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야 공산당에 입당했다. 집권 당시 55세이던 화궈펑은 엄밀히 말해서 관록과 명성 자체가 72세인 덩샤오핑에겐 숫제 견줄 바가 못 되었고, 덩샤오핑의 심복인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 정도의 레벨로 보기에도 무리일 정도였다. 예를 들어 1949년 국공내전 말기 덩샤오핑은 100만대군을 거느린 [[류보청]]군의 총정치장교인 반면, 화궈펑은 고작 여단 정치장교에 불과했다. 덩샤오핑 뿐만 아니라 예젠잉, 천윈 등 중국 혁명을 지도했던 원로들은 자신들은 마오쩌둥과 함께 신중국을 건설한 동료이자 창업공신이고, 화궈펑과 그 무리들은 기껏해야 마오쩌둥의 가신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신 출신인 화궈펑이 마오의 후계자가 되어 마오쩌둥의 동료들인 자신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건방지게 지시를 하려 하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마오 시절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당에 복귀하여 점점 세력을 강화하면서 정작 그를 사면[* 근데 이건 실질적으로 마오의 지시였다.]해 준 화궈펑 자신의 권력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혁명전쟁 시절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인물로서 워낙 당과 군에 신망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건국 후에 [[충칭]] 시장을 맡으며 발군의 행정 능력을 보여 저우언라이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 정계로 떠올랐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혁명가로서나 행정가로서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난한 지도력과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라는 명분을 갖췄어도, 실질적인 권력 기반이라고는 후난성 한 곳밖에 없는 화궈펑이 덩샤오핑을 상대하기는 너무나 힘겨웠다. 게다가 중국 대중들이 몇십년 동안 찌든 가난, 그리고 문화 대혁명 때 [[마오이즘]]의 만행에 환멸을 느껴서 마오의 노선에 회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문혁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화궈펑도 덩달아 인기가 폭락했다. '''화궈펑에게 문혁 부정이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양개범시라는 말로 완만히 문혁을 청산하려 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반발만 높이고 말았다. 그에 비하여 덩샤오핑은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이끈 건국의 영웅 중 한 명인 데다가, 그의 지지자들이 문혁 중에 대거 숙청되었다고 해도 [[후야오방]], [[자오쯔양]] 등의 상당수가 건재했다. 특히 [[국공내전]] 시절 덩샤오핑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2 야전군 출신들이 군 상층부에 대거 포진해 있어서 군부의 지지가 덩에게로 쏠리게 된다. 거기다가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이 식량 자급 자족, 차관 전액 상환 등의 우수한 실적을 내면서 화궈펑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사실 양개범시는 자신은 마오의 정통 후계자이니 문혁과 마오사상은 옳지만 사인방이나 홍위병처럼 과격한 숙청과 폭력적으로 추진하지말고 온건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 노선을 걷자라는 생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