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궈펑 (문단 편집) === 노후 및 사후 === 실각 이후 실권은 잃었지만, 하야한 후 박해를 당해 문혁 기간 목숨을 잃었던 [[류사오치]]나 [[펑더화이]]와는 달리 전직 국가원수의 예우를 받으면서 실권만 없어지는 것에 그쳤다. 사실 본인도 별로 권력욕이 없었던 듯 하며, 대세가 덩샤오핑쪽으로 기울어지자 바로 대권을 포기하고 예우를 받는 쪽을 택했다. 중국에서는 북한이나 스탈린 시절의 소련과는 달리 권력투쟁이 곧 사법살인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없었고, 기본적으로 마오쩌둥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실각한 [[펑더화이]]나 [[류사오치]]도 국가기관이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실각 및 낙향에 그쳤다.[* [[문화대혁명]] 시절 당시에는 박해를 당하고 지병이 도져 사망했지만, 이런 박해는 마오쩌둥 광신자들인 [[홍위병]]이 사적으로 행한 것이었고 국가권력과는 무관했다.] [*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권력투쟁이 마냥 비폭력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1950년대 초반 저우언라이를 밀어내고 제2인자로 발돋움하려다가 실각한 [[가오강]]같은 경우는 실각후 반당행위자로 몰리자 자살했고 [[린뱌오]] 같은 경우는 실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도주하면서 추락사했다. 다만 이들과 거사를 같이 한 자들 (가오강의 동지인 라오수스나 린뱌오의 공군 참모들들)은 감방살이를 오래하긴 했지만, 처형되지 않고 대체로 천수를 누렸다.] 당연히 문화대혁명 이후에 실각한 화궈펑은 류사오치나 펑더화이보다도 훨씬 더 대접을 받고, 상징적인 지휘에서 "상왕"대접을 받았다. 화궈펑은 2002년까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계속 선출되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같은 역대 주석들도 화궈펑을 어른으로 모시면서 노년을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화궈펑은 정년(70세)이 되는 1991년까지 당 중앙 위원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점지한 중앙 위원은 정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2000년대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화궈펑뿐만 아니라 소4인방이라고 불리던 화궈펑 일파(왕둥싱, 지덩쿠이, 우더, 천시롄)도 감방이나 수용소로 가지 않고 [[한직]]으로의 [[좌천]]으로 마무리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중 왕둥싱은 99세가 되는 2015년에야 사망했고,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전사이자 우수당원"이라는 추도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9월에는 탈당설 오보가 났다. "나는 공산당원으로서 당과 당원들이 나날이 부패해지고 변질되는 상황을 통탄한다. 이같은 부패로 당이 민심을 상실해 국가와 민족의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공산당이 과거 국민당 및 자산 계급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며 공산당의 부패를 강하게 질타한 다음에 [[후진타오]] 등의 만류에도 탈당을 하겠다고 표명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중국 관련 뉴스에 자주 있는 해외 반중국 화교 언론[* 대표적으로 미국에 서버를 둔 보쉰(boxun.com)이 있으며, [[파룬궁]] 계열 대기원시보도 마찬가지다. 이들 반중 화교 언론들은 주로 가짜 뉴스로 악명이 높으며, [[장쩌민]] 체포설, [[장쯔이]], [[보시라이]] [[성상납]]설 등을 퍼트리다가 오보로 판정되거나 고소당해 거액을 물어준 바 있다.]이 만든 [[가짜뉴스]]로 전혀 근거가 없다. 실제로 화궈펑은 이후 2007년 공산당 17차 당대회에 출석한 바가 확인되었다.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랫동안 별다른 문제 없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베이징 올림픽 관람을 준비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8월 20일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 해가 [[2008 베이징 올림픽]] 기간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거의 묻혔다. 물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그를 [[바바오산 혁명공묘]][* 대한민국의 현충원 같은 중국의 국립묘지. 과거 문헌에서는 한국식 한자독음에 따라 팔보산 혁명묘지라고 표기한 경우가 많다.]에 화장했고, 그 자리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이 모두 참석했다. 시신은 고향인 산시성 쟈오청에 안장했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경험을 거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당과 국가의 중요 직무를 역임한 화궈펑 동지"를 공식 추도사로 정했다. 2019년 10월 1일 건국 70주년을 기념해 성대히 열린 열병식에서 군대가 지나간 후 민간인들이 각 시대의 의상을 입고 그 시대의 지도자 초상화들을 앞세운 퍼포먼스를 벌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최고지도자의 초상화가 나온 것은 물론 국조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의 초상화도 행렬에 나왔지만, 유일하게 화궈펑의 초상화만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존재감이 없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모두 군인 고위직을 거쳤고, 딸들도 행정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